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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Apr 17. 2020

봄비로 찾아오는 사람

첫 회사에서 만난 미녀 청소 아주머니




창밖에 봄비가 속살거려

2층 정원은 남의 나라


          

봄비가 내리는 4월의 어느 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정원을 찾았다. 빌딩 숲이 삭막해서였는지 내가 있던 건물 2층에는 인공 정원이 있었다. 나무 몇 그루로도 충분히 녹음을 느낄 수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애연가들은 연기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도 했다. 청년인턴으로 근무하던 나는 상담 같은 잡담을 위해 멘토님과 그곳을 자주 찾았다. 그날은 비가 내려서 바깥에 나가지는 못하고 대신 비 구경을 택했다. 내 속도 모르고 나무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 이방인 같은 자여. 진정 나의 나라는 어디란 말이냐. 할 일이 없는 것도 가시방석이고 밀물처럼 몰려올 채용 공고에 자기소개서를 쓸 생각을 하니 갑갑하기만 하다.’     


“와. 참 예쁘다. 정말 예쁘지 않아요?” 순간 내 왼쪽 귀가 커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모습이 참 예뻐요. 아, 좋다.”          


분명, 나를 향한 목소리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비 구경을 하는 내 옆에 와 계신 분은 건물 2층을 관리해주시는 미녀 여사님이셨다. 그분은 봄비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신 표현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순간, 머릿속에 복잡함이 사라지고 잊고 있던 순수함이 몰려들었다.   

  

“맞아요, 오늘 오랜만에 비가 와서 그런지 나뭇잎이 더 예뻐 보여요.”      


우리는 창밖에 봄비를 배경으로 몇 마디 나누며 비가 주는 여유를 누렸다. 여사님은 정말 행복해 보이셨다. 자그마한 키에 뽀글뽀글 파마가 참 잘 어울리시는 그분은 사회에 나와 내가 뵌 분 중에 표정이 가장 좋으셨다. 그래서 감히 제일 미녀로 부르고 싶었다.     





2층 여자 화장실은 여사님과 내가 처음 만난 장소다. 봄비가 내리기 한 달 전쯤, 손을 씻고 나가려는 찰나 여사님과 마주쳤다. 못 보던 얼굴이라고, 반갑다고, 출근길은 안 힘들었냐는 여러 질문에 당황할 새가 없었다. 그 질문 하나하나가 참 다정해서 첫 사회생활에 모든 게 어색하고 불편했던 내 마음이 봄날 녹는 눈처럼 서서히 사라졌다. 연세가 꽤 되셨을 것 같은데 스물다섯 살 풋내기에게 언제나 존대를 해주셨고 진심으로 존중해주셨다. 그 모습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지만, 점차 참 어른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 화장실에 갈 때면 여사님을 먼저 찾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는 날이 많았다.    

 

     

진정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그해 여름은 비가 몹시도 내렸다. 봄비의 정취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이제는 수해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날, 여사님은 그날따라 기분이 더 좋아 보이셨다.    


“기분이 좋아 보이셔요.”

“글쎄, 오늘 회사에서 우리한테 삼계탕을 대접한대요. 여기서 꽤 오래 있었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여사님이 싱글벙글한 이유를 알았다. 그날은 복날이었고 사측에서 건물 곳곳을 관리하시는 모든 분께 대접하는 보양식 한 그릇은 꽤 큰 의미였던 것 같다. 매번 어디서 식사를 하시는지도 몰랐는데 복날 삼계탕을 드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시간이 흘러 계약 기간 종료로 회사를 떠나게 되었을 때 여사님이 가장 많이 떠올랐다. 이제 그만 나오게 되었다고, 아직 취업이 확정되지 않아서 당분간 집에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꼭 이 회사에 합격해서 여사님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아쉬움을 안은 채 이별을 해야 했다. 마지막 퇴근을 하면서 여사님을 회상했다. 나를 향한 덕담과 위로도 좋았지만 여기서 그분을 알 게 된 사실만으로도 참 행운이었음을 품고 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내 길을 걸었고 얼마 후 취업이 되어 그곳에 닻을 내렸다.     



나의 회사에서 만난 새로운 여사님이 아주 좁은 공간에서 휴식과 식사를 하신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마음이 무척 아팠다. 동시에 인턴 회사에 계실 미녀 여사님이 떠올랐다. 늘 밝은 표정이셨지만 이른 아침부터 쓸고 닦고 일을 하시면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을 것 같았다. 젊은 나도 집안일을 하다 보면 허리와 다리가 아픈데 그분들은 오죽하실까. 초반에는 신입의 패기로 일찍 출근해서 여사님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신입의 옷을 벗을수록 그분들과의 만남은 더 드물어지면서 어느새 미녀 여사님도 잊고 살았다. 그렇게 인연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특히 4월에 비가 내리면 스물다섯에 만난 미녀 여사님이 몹시도 떠오른다. 봄비처럼 예쁜 단비를 내 마음에 담아주셔서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떠난 자리에 새롭게 만난 청년들에게 얼마나 다정한 마음을 선물해주셨을까. 혹시 아프진 않으셨을까. 동료분과의 대화에서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이셨는데, 지금도 그곳에 계실까. 가족들과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계시려나. 성함이라도 기억할걸. 퇴사할 때 작은 선물이라도 드릴걸.  그분께서 주신 다정함을 난 왜 받기만 했을까.


지나간 인연을 떠올리니 어느덧 내 마음에는 아쉬움이 가득 고여 있다. 마르지 않을 4월의 빗물, 그 봄비는 스쳐간 인연도 계속 이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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