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가 마음먹고 밥을 하면

가지밥과 양념장

by 시샘달 엿새

가지! 가지가 문제였다. 점심 뭐 먹지 고민하다가 열어본 냉장고에 가지가 덩그러니 있었다. 지난번 주문 때 그대로, 날 기다린 것 같다. 우리 집에서 가지 먹는 사람은 나뿐이니. 오후에 장 꾸러미가 또 도착하는데 이대로 뒀다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가지를 버릴 것 같았다. 예쁜 비닐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가지가 말짱했다. 아, 다행이다. 오늘은 무조건 가지 요리를 해야겠다. 마침 밥을 새로 해야 했는데, 쌀 위에 살짝 볶은 가지를 얹어 밥을 짓는 가지밥으로 점심 메뉴를 확정했다.



난제는 꼬마였다. 가지를 안 먹어서 다른 메뉴가 필요했다. 오늘 오전 빛의 속도로 도착한 소고기로 미역국을 끓이고 호박전을 부치기로 했다. 은근슬쩍 가지전도 옆에 얹을 계획을 세웠다. 나를 위한 메뉴로는 어제 끓여 놓은 차돌 된장찌개를 곁들이기로 했다. 메뉴는 정해졌는데 또 다른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소꿉놀이하자는 꼬마의 눈치를 살피면서 슬금슬금 쌀을 씻으려 했으나 자꾸 방으로 소환되었다. 아침부터 끌려다니니 벌써 체력이 빠졌다.



그러던 중, 어떤 협상이 이루어져 어느새 나는 주방에 있었다. 가지밥 나만 먹으니까 쌀을 한 컵 반 씻어서 물은 눈금보다 조금만 더 넣었다. 가지 2개를 씻어 껍질째 1cm 두께로 어슷어슷 썬다. 파 기름을 위해서 가지 길이만 한 대파도 송송 썰어 놓는다. 프라이팬이 달궈지면 식용유를 세 번 정도 휘 두르고 파를 넣어 맛있는 향을 낸다. 파의 생생함이 시들어 가면 가지를 넣고 파 기름으로 코팅해준다. 간장 1큰술, 들기름을 살짝 넣어 간을 해주고 가지가 숨이 죽기 전에 불을 끈다. 물을 맞춰놓은 쌀 위에 볶은 가지를 올리고 취사를 누른다.


밥을 하기 전 소고기미역국을 끓여놓았고, 밥이 익어가는 중에는 호박전 4개, 아까 썰어놓은 가지 3개로 꼬마를 위한 전을 부쳤다. 전을 부치다 생각해보니 가지밥에 곁들일 양념장이 필요했다. 달래가 있으면 좋으련만, 없으니까 시원하게 포기했다. 다시 냉장고를 열어보니 또 잊고 있던 부추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하니 아직 싱싱해서 어서 데려 나왔다. 부추 2가닥을 씻어 송송송송 썰어서 간장 2큰술, 1큰술, 고춧가루, 매실청, 들기름(혹은 참기름) 조금씩, 그리고 통깨와 함께 넣어 섞었다.



앗! 깜짝이야! 밥솥이 할 일 다 했다고 열심히 외치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보니 쌀과 하나가 된 흐물흐물 가지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까의 생기는 다 사라졌지만 깊은 맛을 줄 것 같은 기대가 생겼다. 주걱으로 조심스레 뒤집어보니 맨 밑에 누르스름한 눌은밥이 생겼다. 맛있겠다. 가지가 없는 부분을 살살 골라내서 꼬마 그릇에 올려 담고 골고루 저었다. 그냥 먹으면 좀 아쉬우니까 달걀을 하나 터뜨려 달걀프라이를 하고 어제 찌개를 데웠다. 기억해보니 김이랑도 잘 어울려서 도시락 김도 하나 까서 접시에 담았다.


자, 식탁으로 가자. 몇 가지 접시를 옮기고, 본인도 옮기겠다고 하는 걸 어르고 달래고 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흐른 후 드디어 식탁에 앉았다. 꼬마는 호박전을 이미 다 먹고 미역을 떠서 식히고 있었다. 그사이에 많이 먹었네? 아무튼 혼자 잘 먹으니 기특한 마음을 안고 식탁에 앉아서 한술 뜨려는데. 전업주부가 마음먹고 밥을 하면 체력이 바닥난다. 그것도 잠시, 체력은 체력이고 그래도 오랜만에 맛있어 보이는 접시에 흐뭇한 감정이 샘솟았다. 부추를 넣은 양념장을 얹어 달걀노른자를 톡! 터뜨렸다. 쓱쓱 비벼본다. 아직 표현이 어려워서 답답할 뿐, 이 맛이 좋고 정겹다. 난 언제쯤 너끈히 음식을 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에 설거지 걱정은 잠시 미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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