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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May 20. 2020

그녀의 혼술 역사

그들의 술 이야기

그 남자에게는 술이 안 받는다. 그 여자는 술을 좋아했다. 둘이 함께 처음 마셨던 맥주는 그녀의 본색이 드러나기 전이었기에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좁힐 수 없는 취향은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에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피어올랐다. 그가 있는 세상에 그녀가 태어났다. 그것도 4년 후에. 그러나 함께 술을 마실 때는 그녀가 미성년자를 대동한 기분이었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변함없이 나타나는 홍익(紅益) 안면은 그녀에게 놀라움을 넘어 건강에 대한 염려까지 이어지게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그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가끔 친한 친구와 날을 잡아 마시거나 아니면 혼술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는 험난한 사회생활을 극복하려는 의지였으니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퇴근길 새로운 맥주를 고르는 재미가 좋았고 친구가 좋아했던 막걸리도 단골 주꾸미 집에서 한 잔씩 걸치며, 순할 것이라는 유자 소주가 전국을 강타할 때 달달한 맛에 매료되어 자주 찾곤 했다. 포도주도 한 병씩 마련해놓고 방 안에 앉아 홀짝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녀는 알아서 술을 즐겼다. 가끔, 그에게 발각되어 소환당하는 순간에는 그녀에게 며칠간 안고 갈 미안함이 차올랐다.



역시 반대가 끌리는 법이기에 이 둘은 결혼을 했고, 신혼집에 들어온 커다랗고 하얀 냉장고를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뭔가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 시절 그녀가 좋아하는 맥주를 색깔별로 정렬하는 재미와 뿌듯함이 있었다. 신기한 건 그 술을 그녀만 먹을 줄 알았는데 퇴근한 그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꾐에 넘어간 것인지 자발적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느덧 그도 맥주 한 캔은 쉽게 마시게 되었고 점차 결혼 전 호리호리한 모습은 사라지고 사랑과 편안함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신혼의 재미가 이어지던 어느 날, 그렇게 즐겼던 술을 절로 찾지 않게 되었다. 인체는 참 신비롭다. 그녀의 뱃속에 또 다른 심장이 생겼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술을 대지 않았다. 그 좋아했던 맥주 한 모금도 절로 피했으며 1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술을 일절 마시지 않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오랜만에 마신 술은 처음 마셔본 술처럼 아찔해서 반가웠고 다시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냉장고를 채워봤지만, 전과는 다른 체력과 밤낮 없는 육아 생활로 술은 점차 생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왕년 즐거웠던 기억이 있기에 그 추억만으로도 가끔 술이 생각나는 밤이 있다. 지금이 그런 걸까. 하루를 돌아보며 피로가 노곤노곤 몰려올 때, 특히 금요일 두 김 씨 부녀가 방 안에서 잠이 들고 그녀 혼자 잠이 안 올 때, 그래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꼭 그렇다. 이럴 때는 랜선 건배라도 즐겁다. 그렇지 않다면 오랜만에 혼술을 해본다. 맥주는 작은 캔, 아니면 포도주 한 잔이 딱 적당한 것 같다. 식탁에 올려놓고 홀짝거리며 뭔가를 해본다. 책을 읽어도 좋고 영상을 봐도 좋고 아니면 그냥 있어도 좋다. 어라, 그런데 이상하다. 몇 모금되지도 않는데 취한다?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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