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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May 21. 2020

책이 데려오는 신선한 바람

책을 읽고 싶은 이유

때는 아기의 돌 전, 계절의 변화도 느낄 틈이 없이 온종일 아이와 집에만 있었다. 삼시 세끼 3일 치 이유식(3*3=9)을 만들었고 뒤만 돌아보면 빨래와 젖병 소독 업무가 산처럼 쌓였다. 손을 안 대면 티가 나버리는 집안일의 얄짤 없는 본색에 억울함을 느꼈고 이 와중에 점점 집안 탐험을 떠나는 아기에게 눈을 떼지 않기 위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렇게 체력 고갈과 수면 부족, 심지어 머리카락도 무수히 빠지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행복과 인내라는 극단의 양면을 체험했는데, 인내의 시간이 참 고역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신선한 바람이 필요했다. 너무 갑갑해서 5초라도 바깥공기를 맡고 싶었다.



바로 그때, 책꽂이에 있던 ‘내가 산 책 대부분이 그랬듯, 그 책도 시작은 했으나 끝내지 못했던 책’(할 엘로드 저, <미라클 모닝> p.43 인용)이 보였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책을 꺼내 휘리리 바람을 일으키며 아무 장이나 펼쳐 보았다. 그런데 한 문장을 읽었는데도 내 안에 상쾌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책을 보면서 이런 느낌이 생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책이 데려다준 신선한 바람으로 마음과 머릿속을 환기했다. 바깥공기를 쐬지 않았는데도 기분이 좋아지는 신묘한 마법에 아기를 보거나 집안일을 하면서도 자꾸 책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간 독서를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날 책을 마주한 찰나의 순간은 31년 삶에 특별한 날로 남아 나의 인생과 육아에 전환점이 되었다. 책을 매일, 조금이라도, 꾸준히, 정성껏 읽어야겠다고 온몸과 마음으로 요동치며 나를 다짐하게 했다. 이왕이면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난감 헝겊 책을 시작으로 동요가 나오는 사운드 북을 가져 놀았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수면 등을 켜놓고 사랑한다는 말이 계속 반복하는 책을 함께 읽었다. 손 안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편리함 덕에 아기 책도 내 책도 틈틈이 장바구니에 담았고 아기가 커가면서 책도 많이 늘어났다. 혹시나 아이에게 거부감이 들면 어쩌나 고민도 많이 하면서 한발 물러서기도 했다.



새로운 마음과 다짐은 알겠다만 매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에 대한 약속을 지키자는 굳은 의지가 필요한 일인데, 그 굳은 의지를 지키는 것이 참 어렵다. 나약한 나는 육아라는 핑계로 숱하게 나에게 졌다. 그래도 최소한 책을 멀리하지는 않았다. 읽지는 않더라도 침대 머리맡, 소파, 아기 책상, 식탁 등 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장소에 책을 툭툭 올려놓았다. 그렇게 지나가다가 슬쩍 보기도 하고 그냥 두기도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습관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어림없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지난해 어떤 보통날, 캄캄한 겨울날 아침에 이불속에서 눈을 찡그리며 오늘의 기사와 실시간 검색어 같은 이러저러한 이슈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 시선과 손가락이 선택한 것은 독서 모임 구성원 모집을 위한 블로그였다. 온라인 독서모임?! 그것도 실천 독서?! 나도 모르게 내 몸은 달콤한 이부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왠지 이것은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할까, 말까 잠시 고민을 했었지만 그냥 했다. 지금껏 안 해서 후회한 적이 많았기에 더는 스스로 만든 핑계가 통하지 않았다. 이 기회로 독서모임의 일원이 되었고 새해 한 달간 읽은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미래도 그려보며 지금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 다짐한, 훗날 돌아봤을 때 내 삶에서 무척 중요할 시간이 되었다. 이때의 독서가 실천으로 이어져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내게 바람을 쐬게 해 준 책은 책에 관한 책이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알려준 책이라 전환점이 된 것이리라.



지금은 글을 쓰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그냥 읽고 싶어서 책을 읽는다. 또 지혜를 얻고 싶어서 책을 읽고 어렵지만 꼭 알고 싶어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싶어서, 아니면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리고 싶어서도 책을 읽는다. 마음에 신선한 바람을 느끼게 해 준 독서의 이유가 다중적인 자아처럼 다양하게 많아졌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 역시나 쉽지 않다. 책을 제대로 읽고 싶어서 시간이 걸리고 무엇보다 읽고 싶은 책들이 첩첩산중 쌓여간다. 책 파먹기도 현명한 해법이 될 것 같지만 대세를 놓칠 수는 없다. 이 마음이 부디 삶의 끝까지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라면 이 마저도 욕심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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