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산책
오전을 잠재운 비가 점차 물러가더니 어느새 꼬마가 햇살을 반긴다. 그 작은 몸짓으로 발산하는 역력한 기쁨에 나도 창밖을 보고 있다. 살짝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나뭇잎에 파도를 일게 하니 그 느낌이 궁금해 집을 나가고야 말겠다. 며칠 전 물려받은 네발 자전거에게 동네 구경을 해주자고, 우리 빵도 사 오고 저기도 가보자고, 꼬마를 설득해 채비를 마쳐본다.
아파트 단지 내 자동차를 피해 자전거를 조심스레 움직여본다. 자전거를 탄다기보다는 자전거처럼 생긴 유모차를 내가 미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네 바퀴에 마음이 빼앗겨 그 좋아하는 놀이터도 그냥 지나간다. 웬일인가 싶지만 이때다 싶어 나는 커다란 동네 한 바퀴를 꿈꿔본다. 단지를 벗어나려 하자 꼬마가 두려워한다. 아빠가 걱정한다고, 여기 우리 집에서 멀지 않느냐며 별걱정을 다한다. 꼬마에게는 미지의 세계인가 보다. 여기 나가면 자전거 타기 편하다고, 언니 오빠들도 자전거 많이 타지 않느냐면서 빵을 사러 가자고 꾀었더니 그렇게 하겠단다. 참 예측할 수 없는 답변이다.
아파트의 경계인 울타리를 지나가는데 비가 고인 바닥에 맑은 하늘이 비쳤다. 그 얕은 빗물을 꼬마 자전거가 물결을 일며 지나간다. 바퀴가 맑은 하늘이 담긴 빗물에 세수한다. 애초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나도 모르는 길을 그냥 걷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자주 가는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어쩌면 여기 유치원을 다닐 수도 있겠는데, 아 여기가 거기구나 하면서 틈틈이 지리 정보를 입력한다.
꼬마는 자전거를 잘 타고 있다. 빵 사러 가자는 엄마 말이 거짓일까 걱정되는지 자꾸 물어본다. 그래, 이번에는 정말 가보자. 다시 방향을 돌리니 우리가 자주 지나는 숲길이 나온다. 며칠 전에는 공사로 바쁜 길이었는데 오늘은 조용하다. 숲길에서 자전거를 타보니 꼬마도 행복하단다. 아름드리나무가 제법 세진 햇살을 가려 찬란한 빛을 담은 그늘을 선물하고 있다. 아직 품위를 유지하는 장미의 무리도 반갑고 더 짙은 초록으로 가는듯한 여러 풀이 싱그럽다. 며칠 전에 만났던, 나무 밑 예쁜 노란 꽃을 찾았으나 비로 인해서인지 다 지고 연두 잎만 남아있었다.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헤어지니 괜히 섭섭했다.
숲길을 통과하니 다시 번화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이곳저곳에서 뛰고 자전거를 타는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오늘을 즐기고 있었다. 꼬마 다리가 아픈지 잠시 일어나서 걷는다고 한다. 고사리손으로 자전거를 거들면서 나를 찬찬히 따라온다. 그래, 아플 만하지 그렇고말고. 그렇게 또 구경하며 지나는데 왠지 괜찮아 보이는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세워놓고 큰 문을 힘차게 열어보니 아주 향긋한 빵 내음이 우리를 반겼다. 여기가 스페인인지 이탈리아인지 한국인지도 헷갈릴만한 빵의 종류와 그 냄새가 정말 환상적이었다.
꼬마가 고른 빵과 내가 고른 빵 하나씩을 봉투에 담아 나왔다. 자기 자전거 바구니에 넣어야만 한단다. 다행히 쏙 들어가서 빵을 실은 자전거에 다시 주인이 앉게 되었다. 바로 들어가기는 아쉬워서 더 넓은 공간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기에 꼬마도 익숙한가 보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도 자전거를 오래 탔어도 별 힘든 내색을 안 한다. 조용하게 지금을 즐기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평온의 순간 가운데에 와 있는 기분이다.
그렇게 동네를 누비다 보니 어느덧 저녁때가 된 것 같다. 바람도 더 선선해지고 햇살도 석양과 가까워진다. 아쉽지만 다시 돌아가야 할 때다. 방향을 바꿔 집으로 향한다. 다시 숲길이 나오고 조금 더 걸어보니 우리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다. 꼬마에게는 자전거 여행을 한 기분일 것 같다. 한 시간이 훨씬 넘어서 도착한 우리 집이 여정의 끝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긴장이 풀리고야 말았다. 봉투에 있는 빵을 자랑하며 음료와 함께 힘을 보충했다. 아빠 오늘 이러저러했어. 저기도 가보고 빵도 사 왔어. 하는 말에 꼬마도 나처럼 동네 한 바퀴가 좋았음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