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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May 26. 2020

내 남자의 플레이 스테이션

Best Day Of My Life by  American Authors

신혼집으로 들어가던 우리는 짐도 많이 달랐다. 트럭 한 대가 필요했던 나와는 달리 그의 짐은 차로 한 번만 옮겨도 될 만큼 간소했다. 서로의 짐으로 우리 집을 채우는데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물체의 정체는 플레이 스테이션 4(PS4).




물건 자체가 별로 없는 내 남자에게 그것은 유독 예쁨을 받는 것 같았다. 요 녀석은 까맣고 날씬하게 생긴 본체와 꽃게 두 마리 같은 조이스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거실 TV장에 이것들을 올려놓는 순간에도 애정을 드러내었다. 내 남자의 유일한 취미생활이기에 연애 때 숱하게 듣긴 했었다. 그러나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왠지 모를 질투가 생겼다. 모쪼록 나는 그가 출근하고 집에 없을 때마다 그 물체에 자꾸 눈길은 갔지만 내외하게 되었다.




결핍에서 온 거라고 생각한댔다. 그는 어렸을 적 게임기를 무척 갖고 싶었다고 나에게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렇게 유년시절 친구들의 게임기를 부러워만 하다가 성인이 되어 월급을 받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본인을 위해 돈을 쓴 것이 바로 이 게임기였던 것이다. 그 이유가 충분히 납득이 되었기에 나도 그의 은밀한 취미와 이 게임기를 존중하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게임기에 앉은 먼지도 닦아주고 그러다가 갑자기 전원이 켜지고 CD가 튀어나와 그에게 전화해 끄는 방법을 물어보고. 뭐 이런 식으로 게임기와 나의 어색한 기류를 풀어갔다.




내 남자의 PS4를 바라볼 때면 디지털에 특화된 그에게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느껴졌다. 새로운 게임이 나왔을 때 인터넷으로 쉽게 살 수 있지만 반드시 실물로 사야 한다고, CD를 손으로 만지는 맛이 있다며 나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어렴풋이 그 느낌을 알 것 같았다. 나도 CD와 테이프도 꼭 샀었으니까. 이 세계는 MP3 다운받기와는 천양지차니까.




이런 이유로 우리의 신혼 때는 남부터미널이나 신도림 근처에 가면 참새방앗간처럼 CD 사러 꼭 게임 매장에 방문한다. 그때마다 내 남자의 발걸음에는 신바람이 느껴진다. 까치발을 들고 신상품을 스캔하며 어렵게 물어본 재고 여부에 기분이 좋거나 시무룩하거나 둘 중 하나다. 열개는 넘게 사야 무슨 사은품을 줄지도 모를 핑크색 쿠폰도 잘 챙긴다. 어쩜 이리도 섬세할까. 다음 일정은 까맣게 잊고 게임 CD를 사면서 쿠폰을 챙기는 그의 모습은 해맑은 아이처럼 순수하다. 이 모습을 많이 봐서 남편이 힘들고 지친 날에는 마음먹고 국전으로 향하기도 한다.




나도 이 게임기를 바라만 본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혼시절이 지날수록 그는 나를 플스의 세계로 초대하려 많은 애를 썼다. 특히 축구 게임 위닝은 내가 축구를 좋아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시도한 모양인데 그 꾐에 넘어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조이 스틱 하나를 쥐고 있었다. 내 남자는 내게 메시도 주고 온갖 전략을 다 줬지만 금세 게임에 흥미를 못 느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더는 게임 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여, 남편과 오랜 친구들은 위닝 멤버를 꾸려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날을 위닝 데이(Winning Day)라 칭한다. 내가 친정에 가 있거나 아니면 벼르고 벼른 위닝 데이가 정해지면 그날은 이 남자의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날이 되기도 한다. 위닝 데이 때는 위닝 멤버들의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어떤 이는 집에 잘 있던 게임기를 뜯어 모임 장소로 옮기고 어떤 이는 조이스틱이 낡았다면서 새롭게 장만하기도 한다. 아예 커다란 극장을 빌려 플스를 할까, 이런 얘기도 나누니 실로 그 열정에 놀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나 역시 레벨이 올라가는데 위닝 데이가 끝나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그의 표정에 오늘의 스코어도 맞힐 수 있다.




신혼집에서 3년 반 정도 살고 새로운 집으로 우리의 거처를 옮겼다. 신혼집 거실에 있던 내 남자의 플스는 서재 책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나면서 신혼 때처럼 플스를 자주 찾지 못한다. 대신 한가한 주말 밤이나 아기가 낮잠 자는 휴일에 그가 플스를 찾아간다. 나도 심심해서 구경 가면 모니터에서 게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어떤 날은 귀여운 캐릭터가 많고 어떤 날은 무시무시한 괴물도 나온다. 나로서는 대체 이 게임의 규칙이 뭔 줄도 모르겠는데 내 남자는 금세 알아차리고 차례로 격파한다. 방문이 닫히고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같은 소리와 작게나마 탄식이 문틈을 새어 내 귓가에 꽂힌다. 얼마 후 문이 열리고 나온 그의 표정을 본다. 잘 되거나 안 되거나 늘 둘 중 하나다. 그의 표정이 참 재미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신혼여행지를 고를 때 가장 신중했다. 고심 끝에 고른 신혼여행지는 바르셀로나. 선택의 이유 중 하나가 남편이 좋아하는 플스 4와 관련 있기 때문이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날 우리는 곧장 캄프 누(Camp Nou) 스타디움부터 찾았다.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구동하여 우리 집 TV에 펼쳐졌던 바르셀로나 스테디움 경기장(mes que un club)에 발을 닿으니 가상(플스 4)인지 현실(캄프 누)인지 헷갈릴 정도로 황홀했다. 그중 그가 위닝을 하며 전략을 수정할 때 나온 배경 음악이 참 좋았는데, 그 제목이 'Best day of my life'이다. 그날은 분명 우리에게 노래 제목 같은 날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66j_BUCBMY


Vamos a el Camp 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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