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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Sep 06. 2020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내린 비

She by 잔나비

반갑다. 9월이 되니 공기가 물씬 달라졌다. 창문을 활짝 열고 올해 첫 가을바람을 들였다. 지난여름 비와 무더위로 오래 머문 답답함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높아진 하늘 아래 바람의 움직임을 맞이하니 황홀한 순간이 스쳤다. 한가한 주말 창가에 앉아 음악과 함께 책을 읽었다. 문득, 이런 멋진 날씨가 내 휴식의 배경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몰입하는 사이 구름이 이리저리 움직였고 갑자기 해가 사라졌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다. 창문 틈 사이로 익숙한 흙내음이 올라왔다. 앗, 비가 내린다. 가을을 재촉하는 모양이다.



걷고 싶다. 이 비는 아직 남은 여름과 다가올 가을을 안을 테니까. 이 순간이 사라지기 전에 그저, 계절을 느끼고 싶으니까. 오로지 그 이유로 채비했다. 평소 같으면 청바지에 운동화를 대강 신고 나가겠지만 오늘은 내가 나를 신경 쓰고 싶었다. 옷장을 열어 무얼 입을지 살폈다. 아껴둔 긴소매 원피스를 골라 꺼내 놓았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정성스레 머리카락을 말렸다. 화장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음먹은 날에만 뚜껑을 여는 향수도 꺼냈다. 작은 가방을 메고 오래전 여행지에서 고른 우산을 챙겼다. 드디어, 두근대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걸었다. 단지를 벗어나 가로수 길에 닿았다. 유난히 움츠렸던 봄에 핀 꽃들은 여린 잎으로, 짙은 초록으로 자랐다. 담쟁이는 벽돌색 담벼락을 감쌌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 줄도 모르게 단단한 하나가 된 것 같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멈춘 것처럼 보이듯, 내가 걷는 길을 감싼 초록이 그랬다. 이 안에 얼마나 많은 햇볕과 바람, 비와 풀벌레 소리가 담겼을까. 쉬이 지치는 나보다 더 강인한 모습에 고개를 절로 숙였다. 곧 다른 색의 물결로 변할 것이다. 찬 바람이 불면 메마른 잎은 땅으로 향할 것이고 머지않아 흙이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자연이 움트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무심하게 반복하는 사계절에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시간의 무색함에 아쉬워만 할 것인가. 자연의 모습처럼 묵묵하게 내 길을 갈 것인가.



듣고 싶다. 우산 기둥을 잠시 고개로 잡고 이어폰을 꽂았다.

 

she is everything to me
지친 나를 감싸 안아줄 그대
나를 반겨줄 천사 같은 이름


이 노래는 비가 내리는 날 습도와 어울린다. 평소 아기와 하루를 보내면 좋아하는 노래도 마음껏 들을 수가 없기에, 혼자만의 외출에 음악을 빠뜨릴 수가 없다. 멜로디에 걸음 속도를 맞췄다. 빗물이 고인 곳을 슬쩍 피하면서 그곳에 비친 모습도 살폈다. 오늘이 아니면 못 볼 담쟁이와 가로수를 놓칠 수 없었다. 노래가 끝나면 다시 듣기를 반복하며 여름과 가을 사이에 내리는 빗속을 걸었다. 비와 바람이 긴소매에 닿으며 나를 감쌌다. 요란하지 않은 그 둘이 나만의 시간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돌아왔다. 젖은 우산을 현관에 세우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창밖은 여전히 비가 가시지 않았다. 빗물에 색이 더 짙어진 나무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아마 오늘 밤이 지나면 아주 조금씩 노란빛으로 물들 것이다. 비와 함께한 어떤 소풍(逍風)은 내 안에 들어와 어지러운 마음을 내보냈다.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가을을 먼저 마중한 것이리라.






https://www.youtube.com/watch?v=UbSlWaerUIE


* Who is s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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