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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May 31. 2020

Welcome to London

스물 셋 그해 겨울

여행의 시작은 그 여행이 결정된 그 순간부터다. 2008년 가을학기 내내 고무되어 있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영국에 가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됐다. 생애 첫 여권을 만들었다. 머리를 묶고 귀가 보이도록 증명사진을 찍었다. 일주일 생활비였던 5만 원가량을 수수료로 냈다. 지금부터 긴축 재정을 하면 된다며, 이게 무슨 대수냐며 덜덜 떠는 손을 애써 자제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며칠이 지나 실물이 두 손에 들어오자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렇게 추가로 제출할 서류를 하나씩 준비하면서 어려웠던 중간고사도 마치니 가을이 깊어졌다.      



함께 선발된 학우들과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우리가 떠날 날짜는 2009년 1월 초. 비행은 핀란드 헬싱키로 경유하기에 꽤 긴 시간이 걸린다며 담당자께서는 양해를 구하셨다. 이참에 휘바 휘바 핀란드도 간다고? 왜 양해를 구하는 건지 지금은 이해가 가지만 스물 둘 인생에게는 경유를 하면 다른 나라에도 가 볼 수 있으니 모든 게 좋았다. 인원이 많았기에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조 편성이 있었다. 그 친구들과 수업 외 일정도 함께하며 도움을 주고받으라는 취지였던 것 같다.      



어색함 속에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고 첫 회동도 진행했다. 선·후배 학번과 다양한 과가 적절하게 섞인 상태였다. 이 만남을 통해 영국을 함께할 멤버라니 반갑기도 했지만 워낙 배경이 달라서 조심스러웠다. 주말에 프랑스에 가자, 스페인에 가자는 둥, 벨기에, 스위스 등 아예 배낭여행을 하러 가는 건지 의심이 되는 선배 1, 영국까지 갔는데 언제 한번 스코틀랜드에 가보겠냐며 북부 여행을 가자는 선배 2, 본인은 뭐든 상관없다는 후배 1, 단지 영국만 가도 좋았고 다른 계획은 생각도 못 한 나. 가지각색의 만남이었다. 처음 만나서 어색해 죽겠는데 여행 코드도 이렇게 달랐구나.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첫 만남을 마치니 어느덧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중앙도서관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도서관 업무 시간도 채워야 했기에 주독 야경을 하고 기숙사에 도착하면 밤 아홉 시가 기본이었다.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다시 시험을 준비하고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하루가 지났었다. 어느 날은 도서관에서 밤을 새기도 했다. 교수님께서 깜짝 퀴즈를 내서 성적에 반영되었던 과목, 그 퀴즈 빵점을 맞아보기도 했던, 지금도 왜 수강했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는, 중급회계 2를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잠이 든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학교에 일찍 도착한 나의 은인, 내게 영국행을 권유했던, 나의 달걀노른자를 깨준 그녀가 아침밥을 먹자고 부스스한 나를 끌고 나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에는 1파운드(1900원)짜리 학생식당 어묵국이 있었다. 음, 좋아하는 조식 반찬이군. 따끈한 그 아침 백반에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추운 바람을 맞으니 현실로 변한 꿈이 내 곁에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겨울이 몹시 반가웠다. 난 이미 영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철야 시험을 몇 개 마치니 종강했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다들 짐을 빼고 집에 갔다. 매우 힘들었던 과목의 학점이 하나씩 뜰 때마다 떨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재수강까지 염두에 뒀던 과목도 뜻밖에 선방하며 2008년 가을은 나의 대학 8학기 중 최고 학점을 받았던 학기로 남았다. 장학금도 가능할 것 같았다. 신나는 마음으로 짐을 꾸렸다. 최소한의 옷, 책 몇 권, MP3, 전자사전, DSLR, 우리나라 기념품, 부모님이 주신 용돈과 나의 요구불예금 전체를 털어 바꾼 파운드와 유로, 그리고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서 주신 리무진 비용을 선물로 받아 2009년 1월의 어느 새벽에 인천공항 행 리무진에 올랐다. 우리에게 그날은 33시간이었다. 어둠 속 긴 비행 끝에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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