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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달 엿새 Jun 07. 2020

휴강하려면 곱게 하시든가

맨큐 교수님보다 더 생각나는 사람

8시 20분. 하늘은 온통 하얗고 차들이 빨간 불빛만 내 뿜으며 도로 위 주차장을 만들고 있었다. 답답한 버스에서 간신히 탈출한 나는 괜히 날씨 탓을 하며 뛰기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 산 중턱 5층에서 열리는 강의에 지각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일. 육교를 넘어 체감상 45도 비탈길을 오르고 구불구불 길을 멈추지 않고 달려야만 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전속력으로 달리면 10분이면 될 테니까. 책을 끼고 우산을 들고 빗속을 달리는 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건물 앞에 멈춰 숨 한번 고르고 축축한 우산을 데리고 한 번에 두 계단씩 올라갔다. 5층이 이렇게 높았던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지만 마지막 힘을 다했다. 강의실 앞에 도착하니 8시 31분.



그래, 이 정도면 선방이다. 아마도 출석확인 중일 테고 지금은 김 씨들 순서겠지. 뒷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교수님은 'ㄱ ‘을 진행하는 중이셨다. 강의실을 재빨리 훑어보니 앉을 자리가 저기 저 구석에 있었다. 책상과 의자가 하나로 붙어 의자를 타고 넘어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그 좁은 강의실에서 2차 미션, 허들을 넘으며 오늘의 1, 2교시를 위해 자리를 찾고 있었다. 간신히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책을 펼치는데 뒤에 나 같은 사람들이 줄줄이 소시지로 강의실 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갑자기 출석 확인이 멈췄다.


“지금 들어온 사람들 죄다 결석이야!!!!!!!!!”


??? 뭐야, 나도 포함이야? 응, 나도 포함이었다. 아니, 지각이랑 결석은 다른 거잖아. 지금까지 나 뭐 한 거니. 어이가 없다 못해 억울하다. 예민한 교수님을 여러 번 자극한 대가가 너무 크잖아.



이뿐만이 아니다. 오후 한 시간짜리 이 수업에 내 친구 H와 여유로운 공강 시간을 보내고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수업 시간을 넘긴 적이 없던 교수님의 행방이 묘연했다. 절대 휴강 같은 건 없을 것 같은데. 내심 기대도 되면서 친구와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강의실 앞문이 열리고 그 교수님과 똑 닮은 - 외모 말고 성격 - 조교님이 들어왔다. 뭐지? 오늘 진짜 휴강이야?


“오늘 교수님 사정으로 수업은 없고 대신 퀴즈 봅니다. 범위는 지난주에 배웠던 내용”


??? 뭐야,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아니, 휴강하려면 곱게 하시든가. 순식간에 변한 상황에 얼떨떨한 와중에 손바닥만 한 종이가 내 자리에 놓였고 그분과 똑 닮으신 조교는 칠판에 문제를 내고 있었다. 아, 망했다. 하나도 모르겠다. 평소 공부를 했었어야지. 내 옆에 H는 거침없이 문제를 풀어갔다. 그래프도 그리면서. 아까 잠깐 도서관에 있을 때 그 친구는 공부하더니만, 이렇게 은혜를 입네. 친구를 쳐다보니 내 답안지가 너무 여백이라, X축과 Y축을 그려놓고 곡선 하나만 추가해 그냥 낼 수밖에 없었다. 답지를 제출하면서 볼멘소리를 늘어놓느라 강의실이 웅성웅성 댔다.


“아, 시끄러워!!!!”


라며, 본인 할 일 다 끝낸 조교가 온갖 짜증을 내면서 퇴장했다. 종종 있던 일이니 그러려니 하면서 우리도 강의실에서 일찍 벗어났다. 휴강하면 보통 상쾌하던데, 이건 뭔가 좀 뒤끝이 너무 찝찝했다. 퀴즈 결과는 빵점.




새내기 1년간 경제학원론 수업을 들으며 그레고리 맨큐 박사님의 이론보다 우리 교수님의 까칠함만 또렷하게 남아있다.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고길동 아저씨 같은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표정보다 더 인상 깊었던, 온갖 가시로 무장하신 그분을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고 마치 고등 때 무서운 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두가 어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업은 알차다는 평이 많아서 2학기에도 그분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가끔 농담을 던지고 웃는 모습도 보여주셔서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 긴장도 되는 날들을 보냈다.



우리와 같은 해에 부임하셔서 열정이 넘치셨을까. 우리에게는 학교지만 교수님에게는 회사니 업무상 고충이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에게 짜증을 낸 건가. 오랜만에 방문한 대형 서점에서 헤매고 있다가 그때 배웠던 <맨큐의 경제학>이 만화책으로 변신했기에 반가운 마음에 들춰보았다. 드문드문 교수님이 수업했던 이론도 나오면서, 배웠지만 여전히 모르겠는 그 이론들을 보니 왜 이렇게 웃음만 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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