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eresa Oct 24. 2021

베랑가나 삼형제

동이 트기 직전의 뒤뜰은 수상할 정도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널어둔 빨래들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고, 그 때문인지 저기 어딘가 사람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악몽을 꾸었다. 나는 깨어 있었지만 온몸이 천천히 굳어 가는 것을 느꼈다. 사지가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좌 우로 흔들어 가위눌림에서 벗어났다. 직감적으로 문이 열린 발코니를 확인했다. 뒤뜰 넘어 숲으로부터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완전히 겁을 집어먹어버린 나는 어떻게든 다시 잠이 들고 싶었다. 그러나 잔뜩 긴장한 덕분에 뜬 눈으로 동이 트는 아침을 맞이해야만 했다. <호텔 베랑가나>에서의 하룻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바라나시로 이동하기 전 잔시라는 지역에 잠시 머물렀었다. 잔시는 아그라와 바라나시 사이에 있어 이동하기에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인도는 지역 간 이동에 보통 하루 정도 소요된다). 이곳에서의 관광이라면 오르차를 본 것이 전부였지만, 잔시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와 팜트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밀집한 건물이나 교통체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거리엔 사람도 거의 없었기에 흡사 텅 빈 도시를 보는 것만 같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을 팜트리나 바오밥 같은 기둥이 굵고 울창한 나무들이 채우고 있었다. 나는 종종 풍경을 보며 공포 영화의 오프닝 씬처럼 어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리 유명한 지역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비수기의 호젓한 관광지를 잠시 경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잔시를 돌아보는 내내 묘한 정적과 긴장감은 계속되었다.


아마도 오르차를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을 거다. 나는 늦은 오후에 갑자기 탄두리 치킨이 먹고 싶어 졌다. 어떻게 알고 갔던 것인지 탄두리를 먹기 위해 근처 <잔시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차도를 걸어갈 때 하늘엔 까마귀로 보이는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파란색 페인트 칠이 벗겨진 외벽과 완전히 낡아버린 포치가 겨우 매달린 호텔 건물에 들어서자 긴장감은 배가 되었다. 나는 유리창 너머 건물 안쪽을 유심히 살폈다. 내부엔 불이 꺼져 있었다. “마을이 전부 파업이라도 해버린 거야? 꼭 유령도시 같구만.” 손님은커녕 주인도 휴가를 떠나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호텔 식당 입구에 서서 “헬로우-?”하고 전혀 기대감 없는 목소리로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조금 뒤 기대하지 않았던 중년의 남성이 식당 홀에 나타났다. 편하게 셔츠에 청바지 차림을 한 남성은, 웨이터이자 주방장이자 프런트맨 겸 호텔 사장일 것만 같았다. “저녁식사는 6시부터에요.” 그는 짧게 대답한 뒤 곧장 퇴장해버렸다. 여유와 무심함이 살짝 섞인 딱딱한 말투는 잔시 사람 특유의 것이었을까? 도시가 쥐 죽은 듯 조용했던 건 그 때문일지 모른다.


나는 홀에 앉아 6 디너 타임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탄두리 치킨이 메뉴에 없어 쵸우멘과 붉은 소스를 곁들인 치킨요리를 주문했다. 그러나 음식의 맛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호텔 베랑가나> 향하던 길에 하늘을 나는 새의 무리를  차례  보았다. 이번엔 까마귀가 아닌 박쥐였다. 커다란 팜트리 아래로 붉게 해가 떨어지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으스스한 분위기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했다.


잔시에서의 기억이라면 <호텔 베랑가나>를 빼놓을 수 없다. 베랑가나 역시 호젓한 곳에 자리 잡은 숙소다. 잔시 호텔과는 머지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이곳 역시 넓은 정원과 오래된 3층짜리 건물이 어딘지 기이하게 스산한 느낌을 주었다. 베랑가나 호텔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계단 층계마다 가로로 네모난 창이 나 있다. 나는 호텔을 떠올릴 때면 늘 층계의 창문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창가는 볕이 들어오는 오후엔 아늑함을 주었지만, 밤이 되면 주위를 금세 오싹한 분위기로 만들어버렸다. 천장이 높은 호텔의 로비는 낡은 소파와 길게 늘어뜨린 샹들리에만을 갖추고 있었다. 인도 특유의 허름하고 예스런 모습이었다. 벽면엔 기다란 창을 들고 말을 탄 여인의 초상화가 삐딱하게 걸려 있었는데, 흡사 잔다르크와 같았다. 로비에 들어서자 리셉션의 나이 든 프런트맨이 나에게 짧은 환영 인사를 건넸다. “웰컴.”

잔시의 기억이 거의 소실되어버렸으므로 여기서부터는 남은 기억의 조각에 적절히 MSG를 첨가하여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겠다. 리셉션에 두 명, 마당에 한 명, 이렇게 총 세 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여행 일기장에 적힌 대로라면 이들은 베랑가나 삼형제다. 베랑가나 형제들을 마주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이따금 호출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묘한 분위기를 뿜으며 나타났다. 프런트맨 역시 거의 말이 없었는데 그가 형제 중 첫째인 듯 보였다. “ 침대, 변기, 샤워, 티브이, 전화.” 그는 객실을 안내할 때에조차 슈퍼 노멀한 태도를 고수했다.


한 번은 숙소의 키가 말을 듣지 않아 리셉션에 호출을 해야만 했다. 아마 전화를 사용할 줄 몰라 직접 로비에서 그를 불렀을 것이다. 그는 객실 문에 열쇠를 꽂고 한참을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이렇게 하면 될 거예요.” 하고 잔시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열쇠 사용법을 일러 주었다. 나는 바닥에 엉망으로 짐을 펼쳐 놓고 발코니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발코니에 서서 뒤뜰의 풍경을 잠시 감상하고 있을 때, 역시 베랑가나 형제 중 한 명과 마주칠 수 있었다. 비교적 팽팽한 피부로 미루어 보아 그가 막내였을 것이다.


그는 정원수를 옮기고 있었던 것 같다. 혹은 잔디를 정리하고 있었거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선 채로 한 동안 내게 옅은 미소를 보냈다. “방은 마음에 드슈?”하고 묻는 듯했다. 우리 둘 사이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편안하고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어떤 기괴한 정적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조던 필 감독의 영화 <겟 아웃>이나 <어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기괴함이었다. 나는 씨익 웃어 보이며 화답했다. 대낮에 주고받은 인사는 뒤뜰 너머 숲에서 불어온 바람의 흐느낌 덕분에 한층 더 으스스하기만 했다.


저녁에 샤워를 마치고 나오며 객실 천장 위를 기어오르는 커다란 도마뱀 두 마리를 보았다. 이 파충류들 역시 전혀 해롭거나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잔시에서는 도마뱀 마저 불길한 일을 암시하는 메타포가 되기에 충분했다. 다행히 악몽을 꾼 것을 빼고는 새벽까지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의 악몽과 가위눌림은 분명, 박쥐 떼와 호텔의 스산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지금만큼만 있었더라도 잔시의 호젓함을 양껏 누리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정말 무서운 일은 뒷날 저녁 숙소를 퇴실할 때 일어났다. 하루 종일 발코니에 널어 두었던 빨래가 단 한 개도 마르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에 습도가 높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 젖어 있을 것이라 생각지는 못했다. 축축하게 젖은 빨래를 배낭 안에 집어넣을 때의 그 공포란. 아마 파자마를 물에 흠뻑 적신 뒤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 끔찍함과 같을 것이다. 빨래는 어쩔 수 없이 그 상태로 한참이나 방치되어야만 했고, 바라나시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퀴퀴하고 눅진한 냄새를 풍기며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이전 15화 소우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