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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esa Oct 22. 2021

소우주



그날도 새벽에 어김없이 비가 쏟아졌다. 우리가 별을 보기 위해 옥상에 오르는 날이면 늘 그랬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아빠는 “별 보면서 잘까?”하고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오빠도 나도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기에 단번에 그 제안을 수락했다. 아빠는 두터운 담요와 모기장을 챙겨 옥상으로 향했다. 오빠와 나는 제 몸집만 한 베개를 하나 씩 꼭 잡고 난닝구 차림으로 아빠의 뒤를 졸졸 따라 올라갔다. 아빠는 빨랫줄에 모기장을 예쁘게 고정시킨 뒤 바닥에 담요를 두텁게 깔았다. 늘 그랬듯 아빠의 왼편에는 오빠, 오른편에는 내가 누웠다.


우리는 마치 은하를 탐험하는 스타로드와 그의 동맹자들처럼 왁자지껄 떠들며 깊은 밤을 침공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자기 얘기를 하기에 바빴다. 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빠의 팔을 잡아끌며 ”잠깐만, 내 얘기를 좀 들어봐!”하고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내 차례를 보채곤 했다. 별을 보러 올라갔지만 매번 셋이서 수다만 떠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얘기할 거리가 떨어지면 우리는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약한 침략자가 되어 침묵 속에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나는 별들을 다 세기도 전에 잠이 들곤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맑은 해를 보며 아침을 맞이했던 기억은 없다. 언제나 새벽이면 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비 온다!”흔들어 깨우는 아빠의 목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베개를 들고 옥상 아래로 내려가곤 했다. 계단을 달려 내려갈 때면 뒤꿈치가 트인 고무 슬리퍼가 벗겨지기 일쑤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빠는 어쩌면 일부러 비가 온다는 말로 깊이 잠든 오빠와 나를 깨웠을지 모른다. 한여름 이라곤 해도 새벽은 어린아이들이 버티기에 많이 추웠을 테니깐. “일어나!”같은 불호령만으로는 절대 고분고분 일어났을 리 없다. 비가 쏟아진다고 소리를 질러줘야 부리나케 일어난다는 것을 아빠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몽사몽으로 뛰어 내려갔으니 정말로 비가 내렸는지 어쨌는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졌던가? 어쩐지 비를 흠씬 두들겨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별보기는 몇 번 해보지도 못했는데 오빠와 나는 그새 ‘으른’이 되어버렸다. 서울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별은커녕 달도 눈에 담을 겨를이 없었다. 이따금 휴대폰 너머로 “밥은 먹었니?”하고 묻는 아빠의 낯익은 인사말을 듣는 게 유일한 가족과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스물넷이 되면 꿈을 이루고 별도 달도 전부 손에 넣을 줄 알았건만, 20대 내내 무엇을 해도 영 시원치 않고 서툴렀다. 몸만 컸지 아빠의 팔을 붙잡으며 보채던 어린 시절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아그라로 향하는 버스 침대칸에 누워 그렇게 다 지난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는 일이 잦았고, 하늘의 별을 보자 “비 온다!”하고 외치던 스타로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고속버스가 덜컹거리며 달리는 덕분에  엉덩이와 등짝은 남아나질 않았다. 침대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짐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거기에 누워 잠을 청하는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흡사 내가 짐꾸러미라도 되어 이리저리 나뒹구는 기분이었다. 차창 밖엔 거리의 네온사인들과 가로등, 헤드라이트 불빛이 만들어 놓은 무질서한 은하요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오토릭샤의 소음이 잦아들고서야 거리의 풍경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뻗은 도로를 따라 버스는 은하뚫으며 아그라를 향해 멈추지 않고 질주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깊은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을 어지럽히던 거리의 무질서한 은하가 컴컴한 어둠 속으로 잠시 사라지자, 하늘은 수많은 별빛을 반짝이며 진짜 은하를 이루었다. 사막의 하늘에서 마주하길 바랐던 별들을 아그라로 향하는 작은 버스 침대칸에서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거짓말 같은 풍경에 놀란 나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따금씩 그림처럼 별똥별이 떨어지기도 했다. 내 소원은 늘 별이 지나간 자리에 한참 뒤 떠오르는 엇박자라서, 예나 지금이나 별똥별의 낙하에 맞춰 소원을 빌지는 못한다. 별들은 언제부터 떠 있었을까? 방금 전 까진 분명 없었던 것 같은데.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연 이은 가로등 불빛이 다시 한번 차창 밖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 많던 별들은 순식간에 하늘에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나는 그제야 아주 원론적인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별은 짙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침대칸에 누워 별빛을 바라보며 허밍 어반 스테레오와 오지은의 노래를 들었다. 사방은 넓은 평야와 산, 몇 그루의 나무, 간이 휴게소로 번갈아 풍경이 바뀌었고, 평야와 산 조차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짙게 어두워지자 별들은 더욱 힘차게 빛을 뿜어냈다. 어릴 적 고향집 옥상에서는 수다를 떠느라 별을 놓치곤 했다. 그때엔 아빠의 눈 속에 담긴 별을 보는 게 더 좋았으니까. 스타로드 없이 홀로 새로운 은하를 탐험하는 건 두렵고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같은 별을 보며 소중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행자의 마음은 결코 스러지지 않았다. 달빛이 사막의 모래를 환히 비추었던 것처럼, 별빛은 나의 작고 초라한 침대칸을 안락하게 만들어 주었다. 애써 멀리에서 찾지 않아도 내 안의 소우주에서 나는 얼마든지 쉬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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