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에 옮아가는 시선
예술이 예술로서 달이 뜰 때에
손희정의 평론은, 이를테면 이렇게 이야기되는 하나의 줄기이다. 예술의 힘 중 하나는 <본질을 드러내는 재현>에 있다. 원본을 별도로 두고 완전히 다른 물건으로서 원본을 다시 흉내 낼 뿐인 재현이 오히려 원본을 제치고 그 본질을 드러낸다니 말장난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하나의 예시로써 밤에 잠긴 도시와 야경을 밝히는 가로등을 그린 회화를 들겠다.
우리는 환경으로서 밤night을 판단하고 느낄 뿐, 그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 그러나 야경을 그린 그림을 보면 누구나 그것이 밤을 표현한 줄 안다. 밤하늘을 칠한 조각을 손톱 만한 크기로 잘라서 보여주면 그냥 검은 물감칠 된 캔버스라고 생각할 것이면서도.
조금 더 들어가 보자. 가로등은 인간이 만든 공산품이다. 가로등의 램프 플라스틱을 쪼개어 보여주며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우리가 가로등 램프라는 답은 못하더라도 관찰력이 뛰어나거나 관련 지식이 있다면 어떠한 플라스틱이며 주로 램프 등으로 쓰인다는 답은 족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로등을 그린 오렌지색 조각을 손톱만 하게 잘라 보여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전체 그림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 그림이 밤인 줄 알고, 그 그림이 가로등인줄 안다. 그것이 회화가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힘이다. 사실은 형태이고 색일 뿐이며, 실제 밤이나 실제 가로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사람의 마음에 실재하며 일관된 이미지를 쾅 박아넣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것도 작가마다 다른 개성과 색과 감정으로.
추상화라고 다를 것 없다. 추상화는 감정과 분위기를 이끌어내 현실에 물화시킨다. 사진은 다양한 색이 면에 어우러진 인화지일 뿐인데, 누군가 내 부모님 사진의 눈 부분을 송곳으로 파내어 버리면 정말로 존재하는 부모님이 해를 입은 것처럼 모욕감과 분노가 인다. 그것이 예술(이미지)의 재현이며 재현이 인간에게 미치는 힘이다. (다른 예술 장르도 각각의 재현이 있는데 그건 스킵)
그렇다면 <서울의 봄>에서 남성 배우들의 아우라를 느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서울의 봄>이 80년대에 벌어진 군사반란과 그에 대응했던 군인을 재현하는 데 있어 얼마나 장엄하게 성공했는가. 그 성공에 명배우들이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가. 우리 영화계는 남성이 이끌어온 남성적 역사를 재현함에 있어 예술적인 역량을 백 년 이상 누적시켜 왔다. 그 누적됨은 위대할 정도이다. 그러나 소수의 창작자가 집중하여 쌓아 올린 그 단층은 너무나 일관된다.
아름다운 점을 꼽자면 그 단층은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우리나라 영화계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풍미이며, 재현이다. 실제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는 ‘남성적’이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재현은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리얼리티를 갖는다. 그 또한 예술이라 불리는 일련의 방법론이 내포하는 파괴적이고 강력하며 고유성을 지닌 힘이다. (예술이 왜 쓸모없고 위대한가, 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이 열리는 지점이다)
불길한 점을 꼽자면 그 장르를 제외한 다른 단층은 처참할 정도로 수준 미달이다. 이 불균형을 <영화계>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건 계가 아니라 계 속의 일개 장르이다. 삼성전자가 세계적으로 반도체를 만든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리테일에서부터 AI까지 거의 모든 최첨단 산업을 선도하는 대기업을 수십 개 보유한 기술 선도국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하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라고?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는 발전이 없다. 우리는 왕가위며 주성치가 날아다니던 시절의 홍콩영화를 기억한다. 황금기 홍콩영화는 무협이든 멜로든 단 하나의 감성을 지독하게 그려냈다. 불안함과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다. 중국이 부상하며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고 불안한 미래가 현실이 되어 닥치자 홍콩영화는 홍콩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단 하나의 장르만이 빛나는 단일한 성취, <계>를 이루지 못한 미완의 세계는 너무나 쉽게 소멸해 버린다.
또 다른 불길함 하나. 예술의 힘은 위대해서 재현을 거듭하다 보면 그 재현이 그대로 현실이 되기도 한다. 이게 바로 시뮬라크르의 세계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위대한 남성적 역사의 재현이 실제 남성의 역사를 위대하게 만들고 또 거기 참여하는 남성들을 위대하게 만들어, 재현해낼 사실들이 영원히 남성적이 되어 버리는 순환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손희정의 평론은 바로 이 지점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
이 시뮬라크르에서, 위대한 남성을 보는 위대하지 못한 여성으로서는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영원히 침묵하며 존재를 지우거나, 영원히 동경하는 타자의 존재로 남거나. 그야말로 to be or not to be의 세계에 갇힌 셈인데.
이런 양자택일의 세상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쳐도 지금은 백 년을 쌓아온 재현의 역량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으니, 앞으로의 백 년을 내다보고 지금의 초라함과 비루함을 고쳐나가며 단층의 가장 아래에 몸을 던져보자는, 그것. 그리하여 또다른 장르가 생긴다면 그것이 영화<계> 전체에도 좋은 일일 것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우리 영화계의 역량이 충분하다는 전제 하에서, <서울의 봄>에 등장하는 배우를 모두 여성으로 바꾼다면 그 작품은 일본의 남성향 TS 모에화 장르가 아니라 그 여성 배우들이 80년대 우리나라 군부가 가졌던 본질적인 폭력성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쉽게 말하자. 만약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면 그 남성 배우가 여성으로 보여야 그는 연기라는 예술로서 본질을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안 되는 배우는 여성성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실패한 배우이다. 예술성이 없는 배우라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여성성에는 본질이라 불릴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이다.
가능한 일이냐고? 무대 예술을 생각해보라. 좁은 박스 안에 갇힌 영화 스크린이나 연극 무대를 보며 관객들이 왜 극본에 빠져드는지. 2023년의 영화관과 1979년 남산 사이에는 야경 그림과 실제 밤night만큼 공통점이 없다. 정우성과 실제 인물인 장태완 사이에도 가로등 그림과 실제 가로등만큼이나 공통점이 없다. 모든 것은 합의된 상상력의 문제이다.
(1. 전청조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왜 전청조를 남성이라 굳게 믿었는지 생각해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전청조는 배우로서 관객에게 남성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사기꾼과 배우를 동치해 묘사하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2. 중국 경극은 남성 배우가 여성 역할도 한다. 그래도 관객들은 몰입한다. 예술로서의 연기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