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인 Jan 17. 2024

(일기) 구애인과 족발 먹은날: 문화자본과 노동계급

2019.01.17. 그 구애인은 현 배우자다


몇 주 전 애인과 족발 먹으러 갔던 날 식당 분위기가 웃겼는데, 우리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 둘이 각기 민주당과 반민주당(겸 태극기부대) 포지션에서 상호 불꽃대결을 펼치다 나간 이후 우리 둘이서 뭔가 기억은 잘 나지 않는 노동의 가치 뭐 자본주의 뭐… 하여튼 그런 쓸데 없는 이야기를 가게 마감까지 하다 쫓겨났다. 남자들이랑 우리 때문에 사장님 귀에서 피 났을 것 같아서 죄송스럽다. 그날 밤 씻고 나온 후 빌리고 아직 반납을 못 한, 식탁에서 나눈 이야기와 결이 같은 책이 눈에 띄더라. 그게 <차브Chavs>다. 영국의 전통적 노동계급이 구제할 길 없는 차브로 쇠퇴했고 어쩌고 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그 쇠퇴한 노동계급이 브렉시트라는 치명적 결정을 하기 전에 쓰였지만 그들을 위해 충분히 변명하기는 한다. 사회학 저술들이 다 그렇듯 내게는 모두 동의도 납득도 하겠는데 그래서 그 다음 뭐 어쩌자고 싶기는 하지만. 


굳이 차브가 뭔지 설명하거나 책 전체를 요약하진 않으려고 한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해야지. 빈곤이 생활과 양육의 주요 변수가 아니라면 국가와 사회가 굳이 나서서 복지를 챙겨줄 필요도 없다. 괜찮은데 왜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전반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가난해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일종의 기만이다. 몇몇 특수한 조건이 충족됐을 때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금 가난하지만 그 자신 풍요로운 문화자본을 지녔거나 그러한 주변인에 둘러싸여 생활하거나 상향이동의 확률이 큰 직업을 가졌거나 성인군자라면 절대빈곤선 위의 가난이 양육에 절대적 변수는 아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부모와 자식이 양육에 있어서 불행해야만 하는가? 이미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영국에서 노동계급이 몰락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신분과 계급이 살아 숨쉬는 국가에서 사회 구성원 다수가 공유하는 정체성이 무너져 내렸다. 전쟁 이후 사회가 레미콘차 탱크에 들어가 있는 회반죽처럼 섞여버린 한국이야 양극화니 뭐니 해도 계급사회와는 거리가 먼데, 아직도 계급에 따라 말씨가 정해져 있고, 직업에 실질적이거나 명시적인 제한을 받으며 부모의 신분을 되물려주기까지 하는 국가에서는 한쪽 덩어리*가 제 정체성에 부여되는 나름의 자부심과 미덕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문화적 규범에 따라 행동한다. 경계선의 위치야 조금씩 다를지언정 개인이 내리는 평가와 판단의 대부분은 규범에 따른다. 문제는 정체성이 무너져내렸을 때 사람들이 마치 이사하듯이 다른 사회문화적 정체성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의 정신은 무법이 판치는 약육강식의 황무지에 내버려진다. 황무지에서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노동계급이 몰락했다고 하는 것이다. 가난해졌고, 정체성이 무너져내렸다. 선후관계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둘 중 하나만 무너졌다고 계급몰락을 이야기하진 않았을 터다. 노동계급이 가진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이나 브렉시트는 이런 맥락 안에서 탄생했다. 영국과 한국이 너무 다르긴 하지만 공유하면 재밌을 부분은 조금 보인다. 몰락한 자들을 온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도, 어떤 이유일지언정 더 약한 사람들을 향한 부당한 분노는 용서되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옳다. 이런 경우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의견이 더 옳은지 심각하게 따지는 일이야말로 펜대굴림이다. 잘게 쪼개고 또 잘게 쪼개면 어느 부분인가는 누군가 고쳐놓을 수 있는 부분이 보이기 마련이다. 잘게 쪼개는 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관계자를 설득하는 일, 파편을 수리하고 전체 그림에 무리 없이 다시 연결하는 일을 하기 위한 배경으로 논의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쪼개기만 하는 눈 먼 전문가들의 편협함에 동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경제적 대가를 노동에서 얻는 노동계급과 정치세력으로서의 노조가 불가분이고 서비스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한 회사에 오래 있을 필요도, 이유도, 그러므로 소속감도 없고 또한 자신의 업에 숙련될 수도, 숙련될 이유도 없는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됐으며 노조의 힘이 자연히 약해졌고 그래서 노동계급이 와해되고 한다는 지적은 너무 많이 들어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1979년엔 영국에만 공장노동자가 700만 명이었는데 2010년에는 250만 언저리고 앞으로 더 줄어들 거라는 식의 이야기가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진리가 되어버린 만큼이나 노조가 왜 무능하고 무력하냐고 지적하는 것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영국이나 되니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서술에 비장미라도 서리지, 시대의 필연으로 노조가 노동자의 힘보다는 반독재세력의 힘이 되었어야 했던 1960~1980년대와 그렇게 형성된 정체성 덕에 불안정노동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 1987년 이후를 가진 한국은 얻어먹을 빵부스러기도 없었던 셈이다. 그 때는 이미 세계가 숙련노동 없는 미래로 들어선 이후였으니 말이다.


한국은 중산층이 줄어들고 있다고 난리지만 영국 노동계급의 몰락은 노동계급의 자식들이 대부분 자신들을 중간계급이(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데서 완성됐다. 그러니까 전자는 쪼들리는 사람은 늘고 세수는 줄어든다는 읍소이고 후자는 일종의 자기부정이자 노동계급의 모든 유산에 대한 경멸인 셈이다. 재산의 크기 여부가 가르는 계층과 문화규범 및 신분이 여전히 작동하는 구체제의 계급 둘 사이 차이가 드러난다. 사뭇 대비되는 특징이긴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영국이 한국의 양상을 따라가고 있는 듯 보인다. 노동계급의 미덕에 대한 자포자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반대로 중간계급들이 자신들이 노동계급이라고 가볍게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직접 일해서 먹고 산다는 것, 혹은 가난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자식들이 스스로를 노동계급이라고 일컬을 때에는 교육은 받았다는 변명이 뒤따랐다. 그러니까 계급의 이름이 정체성이 아니라 단순히 빈부나 교육의 수준을 재는 잣대가 되기는 한국에 수렴해가는 것이다. 즉, 계급이 없어져가는 것이다.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가난해도 문화자본이 있다면 자신 삶의 질과 양육에 재정상태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역으로 문화자본이 있다면 끊임없이 항구적으로 가난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선택지, 즉 희망이 생긴다. 그런데 문화자본은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닥치는대로 문물을 소비하는 건 문화자본이라고 하지 않는다. 취향에 따라 체계를 지닌 세계가 있고 체계라는 뼈대에 문화물을 차곡차곡 살붙여 나간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기준이 동류집단과 공유되어야 한다. 뼈대와 동류집단. 곧 정체성과 소속감이다. 솔직히 줄어드는 전통적 일자리를 개인이든 정부든 기업이든 누군가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게 시대의 흐름이고, 미래와 싸워 이긴 자는 없었다. 다만 영국과 달리 한국은 사회 구석구석 노동자들의 노동자적 정체성부터 형성되어본 적이 없으니, 노동회의소를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게 어디 작은가. 사회 전체의 반 발자국은 어마어마한 변혁이다. 


* C2+DE: 숙련노동자와 반숙련/미숙련 노동자 및 불안정 노동자와 연금생활자

작가의 이전글 (일기) 특공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