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리 교수의 3C
미국의 중소 도시로 이사를 가니 독립 서점들이 눈에 띄었다. 더 작은 도시로 가면 독립 서점의 수는 더 많아졌다. 이사를 가 처음 자리잡은 도시는 인구 십 이만인 미국 남부의 대학 도시였다. 이 조용한 중소 도시에서는 책을 사려면 독립 서점을 가거나 대형 체인 서점을 가면 됐다. 물론 온라인 주문도 가능했다. 독립 서점은 당당히 도서 시장의 일부를 차지했고 책을 사려는 주민들의 선택지 중 하나였다. 언제부터인가 동네 서점이 없는 환경에 익숙해진 내게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동네 서점의 존재는 이국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독립 서점들이 사랑을 받는구나 싶었다.
이즈음 미국 내 독립 서점의 수는 실제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버드 경영대학의 라이언 라파엘리 (Ryan L. Raffaelli) 교수의 2020년 발표 논문에 따르면 1995년에 아마존닷컴이 등장하면서 급격히 감소했던 독립 서점의 수가 2009년 이래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9년 1,651개에서 2018년 2,470개로 증가했으니 그 수가 큰 폭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전체 시장 규모를 생각하면 여전히 적은 숫자가 아닐 수 없지만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라파엘리 교수는 이런 현상을 “독립 서점의 새로운 부활” 이라고 불렀다. 제목에서도 언급하며 “소매의 재창조 (Reinventing Retail)”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1990년대, 대형 체인 서점의 시장 지배력이 높아지고 온라인 서점까지 등장하자 전문가들은 독립 서점의 시대가 이제 끝났다고 판단했다. 영화 “유브 갓 메일”은 당시의 이런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동네 서점의 고군분투를 영화의 소재로 활용하며 새로운 시장 흐름에 대한 고민과 통찰을 대중에게도 던져 준 영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고 다른 많은 소매 업종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동네에 꼭 하나씩은 있던 가게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초중반 부터였다. 변화를 눈치챌 새도 없이 우리의 동네 풍경은 바뀌어갔다. 그리고 이내 우리는 편리함과 쾌적함에 익숙해졌다.
그러던 2000년대 후반, 종말이 확실시 되던 동네 서점이 소매 환경의 새로운 변화를 알리며 시장으로 복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다시피 수요가 없는 공급은 없는 것이 시장의 진리다. 그렇다면 어떤 수요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었던 것일까. 독립 서점은 어떤 시장의 신호를 받아 재등장한 것일까. 편리함과 쾌적함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애써 찾아가야 하고, 좁은 공간에서 책을 들여다봐야 하고, 디저트나 화장실도 변변찮은 동네 서점이 왜 다시 필요해진 것일까.
소비자의 니즈 속에 마케팅 힌트가 있고, 마케팅 힌트 속에 창업의 단서가 있는 법이다. 새롭게 창업 러시를 이어가는 독립 서점에는 공통된 마케팅 전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공통된 마케팅 전략은 소비자들이 새롭게 추구하는 가치를 보여준다. 라파엘리 교수는 이러한 전략을 3C, 즉 커뮤니티 (Community), 큐레이션 (Curation), 모임 (Convening)으로 정의했다. 이 3C가 중요한 이유는 독립 서점의 부흥을 지속시킬 키워드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다른 작은 가게들에게도 소비자 니즈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원했고, 또한 독립 서점이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커뮤니티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 보다 전문적이고 개인적인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큐레이션, 그리고 소비자들의 모임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돌아보면 미국에서 만난 동네 서점들은 이 세 가지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작은 대학 도시가 가장 사랑했고 나와 아이들 또한 사랑했던 애비드 북샵은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애비드 북샵은 창업과 동시에 지역의 공립 학교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 안에 책을 좋아하고, 책 속에서 길을 찾으며 자라날 지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학 도시의 상징 답게 지역의 대학생들과도 밀접히 교류했고 선뜻 그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커뮤니티 기능). 또한 지역 주민들과의 각종 모임이 애비드 북샵에서 열렸고 우리는 그곳에서 저자를 만나고 낭독회를 열고 누군가의 출간을 축하하거나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시간에 참석했다 (모임 기능). 서점의 주인과 직원들이 공들여 골라놓은 책들을 꺼내 읽고 그들의 의견도 물을 수 있었다. 갈 때마다 판타지 소설을 사들고 나오는 큰 아이는 자신만을 위해 서점 주인이 골라놓는 판타지 소설들을 보려 매주 애비드 북샵을 찾았다 (큐레이션 기능).
3C는 지금의 소비자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되짚어 보면 미국 생활에서 만난 중소 도시의 다른 많은 가게들이 3C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소비자들은 매우 개인화된 경험과 관계를 원하고, 누군가와의 지적인 교류를 원하며, 동네에 애착을 갖고 구심점이 되어주는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들이 대형 체인점이나 쾌적한 쇼핑 환경을 갖춘 쇼핑몰, 온라인 쇼핑몰 등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작은 가게가 시장에서 대형 소매업체와 공존하려면 이처럼 대형 쇼핑몰에서 채워지지 않는 소비 욕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미국의 독립 서점들은 이를 반영하고 충족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3C는 작은 가게의 기능이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소비자에게 작은 가게는 더이상 경제적인 기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독립 서점을 포함한 작은 가게는 관계와 교류의 공간이 되고, 소속감을 주는 커뮤니티가 되고, 특별한 경험과 즐거움을 제공하는 가게가 되어야 한다. 보다 사회 문화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오래전 작은 가게들은 이미 이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동네의 구심점이고 주민들의 사랑방이었다. 3C는 작은 가게의 기능이 새로워졌음을 의미한다기 보다 작은 가게 본연의 기능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