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22살의 나는 친구들과 모임을 마쳤다. 3층, 평소 같으면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갔을 텐데 그날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기가 싫었다. 집에 빨리 가기 싫었다. 계단에 물이 흥건해서 넘어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손잡이를 잡고 한발 한발 걸어 내려갔다. 1층까지 두 계단을 남겨두고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관성이 얼마나 센지, 속수무책으로 바닥까지 굴렀다. 발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망치로 발목을 100번쯤 내리친 듯했다. 친구들이 괜찮냐고 물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발목은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았다. 통증이 점점 가라앉고 발을 조금씩 디딜 수는 있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병원에 갔다. 발목이 금이 가 잘못하면 뼈가 내려앉을 수도 있어서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바로 수술하는 건가요? 진짜요? 지금이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다고 했다. 황당하다. 두려움이 밀려 올 틈이 없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입원 침상에 누우니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내 팔에 수액 연결 커넥터를 연결하고 혈압을 쟀다. 그대로 수술실로 끌려갔다. 노란 조명이 켜지고 녹색 옷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다가왔다. 척추 마취를 한다고 했다. 새우등 자세를 했다. 주삿바늘이 손바닥 만했다. 그제야 수술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바늘을 보지 말아야 했는데. 공포가 밀려왔다. 그런데 마취 주사는 생각만큼 아프지 않았다.
일주일 전부터 아빠와 나는 냉전 상태다. 아빠는 매일 내게 늘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했다. 그날은 친구들과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귀가가 늦었다. 아빠는 내게 실망했는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엄마도 동생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줄 수도 없다. 집에서 아빠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빠는 일주일 동안 내 인사도 안 받아줬다. 섭섭했다. 엄마랑 동생이랑은 웃으면서 대화하면서. 집에서 나만 빼고 화목하다. 아빠는 이대로 평생 나를 모르는 척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아프면, 다들 내 걱정을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아빠도 나를 걱정해 줄 텐데. 입원할 정도여야 한다. 어중간하면 신경도 안 쓸 테니까. 내가 다치면 아빠가 화를 풀어주시지 않을까. 다음날 나는 정말 다쳤다. 수술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내가 입원하면 아빠가 화를 풀 거라고 생각했으면서. 나와 이야기하고 내 인사를 받아 주길 바랐으면서.
평소에 발목을 자주 다쳤다. 이리 삐고 저리 삐고. 양발 번갈아 반깁스 하고 목발 끼고 다녔었다. 덕분에 내 양쪽 발목 인대는 너덜너덜이다. 게다가 스스로를 다치게 해 아빠의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흉악한 심보다. 이런 상황에서 넘어지니 발목뼈에 금이 갔다.
나는 마음의 고통과 몸의 고통을 맞바꾸었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돌아온 나는 한동안 마취 부작용에 시달렸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터트릴 작정으로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는 것 같았다. 극심한 두통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누워만 있았다. 4일 뒤 두통이 사라지니 몸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왔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수술 부위에 물이 닿으면 안 돼서 씻을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혼자 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했다. 퇴원 전 통깁스를 했다. 한동안 통원 치료를 해야 했는데, 우리 집은 3층이고 엘리베이터가 없다. 올라가고 내려가는데 수십 분이 소요되었다. 퇴원 후에도 시원하게 씻을 수조차 없었다. 깁스를 풀어도 발가락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물리치료를 꾸준히 다녀야 했다. 걸으면 발이 아프니까 집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몸무게가 10kg 가까이 불어났다. 협박의 대가다.
입원 첫날, 아빠는 복대를 하고서 씩 웃으며 병실에 들어왔다. 다리를 부수면 어떡하냐고. 이제 꼼짝없이 병원에서 꽤 답답할 거라며 나를 놀렸다. 내가 입원했던 3주 동안 아빠는 매일 왔다. 아빠는 항상 내 휠체어를 끌어줬다. 그런 아빠에게 나는 병원 생활이 너무 재미없다고 말했다. 내 턱살을 만지는 것이 기쁨 중 하나라던 아빠. 휠체어에 좀 익숙해졌을 때, 일하러 가는 아빠를 병원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빠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이 서서히 닫혔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구름층이 얇아 비가 올진 정확히 모르겠다. 일기예보에도 비표시는 없었다. 그때 발목이 욱신 거렸다. 발목을 만져보니 수술 흉터가 시큰하다. 얼마 뒤 비가 왔다. 몸의 반응은 기상청보다 정확하다. 오늘도 걸으면 다리를 절 것 같다. 집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띵. 3층입니다.’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다. 나는 홀로 허연 빛이 가득한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