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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n 09. 2021

완벽주의와 도피

망가진 무언가를 고쳐나가는 삶


눈을 떴다. 햇빛이 두 겹 창을 뚫고 얼굴을 내리쬐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불 품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알람을 맞춰둔 시간보다 4시간이나 늦게 일어났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책상에 펼쳐둔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꾹꾹 눌러쓴 글씨에 내일에 대한 희망이 가득했다. 펜을 들어 오전에 할 일 목록에 엑스자를 그렸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침대에 누워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5.8인치 화면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됐다. 내일부터 다시 잘해보자. 다이어리를 펼쳐 오늘 했어야 할 일 목록을 내일 칸에 그대로 꾹꾹 눌러써 내려갔다.


두 번째 심리상담의 포문을 연 건 '완벽주의'라는 키워드였다. 완벽을 이룰 수 없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모 아니면 도' 식의 사고방식과 이로부터 비롯된 경험들을 나눴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는 완벽한 하루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다이어리 빼곡하게 할 일을 적어놓고, 이를 다 완수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물론 원하는 바를 이룬 적은 한 번도 없고, 대개는 늦잠이 문제였다. 알람을 끄기 위해 에너지를 쏟은 탓인지 다시 이어진 잠은 원래의 분량을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그런 날엔 오전 일정을 다 날려야 했다. 일찍 일어났다면 이루었을 일들을 떠올리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보통 그런 날은 버렸다. 전날의 다짐을 다시 새기고 잠을 청했다.


완벽주의는 굉장히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상담사가 말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하나가 잘못됐다고 나머지 아홉을 버리는 태도는 분명 합리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망가진 하루를 어떻게든 수선해나갈 때의 중압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괜찮은 하루를 '만드는' 일과 '만회하는' . 관점의 차이겠지만,  사소한 차이도 동기부여를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같은 사고방식이 하루 일과를 영위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령 처음 입학한 대학에서 학점을 망쳤을 , 재수강으로 이를 만회하는  선택지에 없었다. 반수를 통해 모든  다시 시작하고픈 마음뿐이었다. 다음번엔  잘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하지만 다시 입학한 대학에서도 역사는 반복됐다. 잠깐 상한선을 유지한 학점은 학기가 지나며 수직하강을 거듭했다. 재수강 과목의 목록이 길어지자 반수에 대한 욕심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그러나 더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나이와 군대 문제 등 다른 여건들을 고려해야 했다. 남은 건 열심히 학점을 복구하는 일밖에 없어 보였다. 불행은 여기서 비롯됐다. 남은 청춘을 지난날의 과오를 만회하는데 써야 한다는 괴로움에서. 그렇다고 이전의 삶이 마냥 화려하고 즐겁지도 않은데. 완벽하지 않은 하루와 대학과 청춘.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지난한 복구 과정보다 나았다. 무기력은 완벽주의의 부작용  하나입니다. 상담사가 덧붙였다.


포기의 결과는 도피와 중독이었다. 첫 대학에서 학점과 대인관계를 말아먹은 뒤 나는 게임에 빠져들었다. 성공 수기의 'Before' 파트에서 볼 법한 완전한 중독이었다. 한나절을 피시방에서 보낸 뒤 집에 와서도 게임 관련 영상을 볼 정도였다. 다음날 눈과 머리가 아려올 정도로 시선과 정신은 종일 화면 속에 머물러 있었다. 중독의 대상은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기도 했으나, 그것을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뒤지며 여가 시간을 보낸다. 모든 의지를 잃고, 전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매일을 반복하고 있다. 무기력과 권태, 염세의 굴레를 부수기 위해 심리상담센터를 찾은 것이었다.


보통 그러한 완벽주의는 부모의 비뚤어진 양육 방식에서 온다고 상담사는 말했다. 그래서 늘 부모 상담도 곁들이게 된다고, 위아래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반드시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 온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이때 의구심이 든 건, 부모는 단 한 번도 내게 완벽을 강요한 적 없는 까닭이었다.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을 향한 믿음과 지원을 거두는 법이 없었다. 늘 최소한을 바랐고, 최악을 용서했다. 그럼에도 완벽에 대한 집착을 품게 된 건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했다. 이를테면 트라우마라던가, 아니면 그냥 천성적인 게으름을 변명하기 위해 뇌가 꾸며낸 시덥잖은 강박이라던가. 유전 탓이라 해도 납득할 준비가 돼 있었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상담사가 제시할 해법은 자연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부족한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세요, 망가진 부분을 고쳐나가는 삶도 훌륭합니다. 다른 명쾌한 해답이 있을  같지는 않았다. 들인 돈이 아까워서라도 다짐의 크기를 키운다면 상담은  값을   것이겠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그는 적확한 비유로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지 못한다고 근처 북한산도 포기해버리면 쓰나요. 북한산도 얼마나 오르기 어려운데. 반박하고픈 마음이 없었던  아니나, 원래의 상담 시간을 초과한 분량이 서비스인지 과금 대상인지  길이 없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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