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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l 08. 2021

아프지만 사랑해서

너도 부모가 돼 보면 알 거다


현관에 들어서면 털이 수북한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사방으로 흔들며 나를 반긴다. 벌써 8년 넘게 우리 가족과 함께한 반려동물 아리(말티즈, 8)다. 어서 자기와 놀아달라고 다리에 몸을 치대고, 간혹 외출이 길어진 날이면 자기를 왜 이렇게 오래 방치했냐고 따지듯 하울링을 해댄다. 미안한 마음에 '까까(황태를 말린 연두색 과자)'를 하나 주고 나면 이제 침대로 모실 차례다. 요즘에는 내가 가자고 하기도 전에 알아서 내 방으로 뽈뽈대며 들어간다. 침대 옆에서, 자신을 들어 올리기 편하게 등을 보이며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이 녀석의 지능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침대에 올려주고 나면 이불 곳곳을 헤치며 장난감을 찾는다. 장난감을 찾으면 한참을 물어뜯고 놀다가 제 몸을 구석구석 핥아대기 시작한다. 이 모든 의식을 마치면 마침내 잠을 청한다. 아리는 내가 쉴 동안 저 발치에서 조용히 제 할 일을 한다. 우리는 서로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할 줄 안다.


문제는 강아지가 제 몸을 핥는 일이 스스로에게 매우 해롭다는 점이다. 축축한 털이 잘 마르지 않아 그 주변에 습진이 생기고, 방치하면 피부염으로 발전한다. 심할 땐 피가 새어 나온 적도 있다. 몸을 핥을 수 없게 목베개를 채워봤지만 앞발을 핥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목고깔을 사야 하나 고민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발을 핥을 때마다 호통을 치며 턱을 잡아당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과정도 고통스러웠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아리는 저를 혼내는 줄 알고 몸을 잔뜩 움츠린다. 흘깃흘깃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핀다. 근엄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 보면 곧장 고개를 떨군다. 스스로를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어디서 주워들은 대로 손가락으로 올리브 알 같은 코도 열심히 때려본다. 하지만 5분만 지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발사탕을 빨아댄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내가 먼저 지쳐 아리를 침대에서 내려버리고 만다.


나라고 발을 핥든 말든 가만히 내버려 두고픈 마음이 왜 안 들겠는가. 아프지만 사랑해서, 너를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리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주인의 의도를 모르는 한 매서운 호통과 코 때리기는 불완전한 사랑의 표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세상이 무너진 듯 주눅 들지 않았는가. 어릴 적 사랑의 매(요즘엔 의미가 변질됐지만)를 떠올려보자. 내 경우엔 효자손으로 허벅지를 찰싹찰싹 맞다 보면 정말 내가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이 아닌지, 이러다 집에서 내쫓기는 건 아닌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분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본 이제는 다 안다. 천둥 같던 호령과 부어오른 허벅지도 사랑의 증표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나는 체벌에 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이다. 특히 그 효과에 대해 그렇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종종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도구로 쓰인다. 강아지가 주인의 마음을 모르고, 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모르듯, 우리 인간들도 신의 마음을 모른다. 예전에 설교를 듣다가 율법에 대해 충격적인 말을 들은  있다. 율법을 지키는  결국 자신에게 이롭다는 말이었다. 이는  성경에 명시된 모든 '해라' '하지 말라' 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시험해 신의 영광에 찬란함을 보태기 위해서가 아닌, 보다 나은  살도록 돕기 위해서라는  뜻했다. 마태복음 7장에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사람이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나온다.  단계 높은 사랑의 층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돌을 떡으로, 뱀을 생선으로 오독해   아닐까.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은 별개의 이미지로 분리할  없는, '아프지만 사랑해서' 전형이라   있지 않을까.


마음은 아파도 사랑한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주인과 반려동물 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아직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연인 간에도 분명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 당장 관계가 틀어지는  두려워,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 ' 때리기' 멈춘다면 장기적으로  사이는 병들 수밖에 없다. 반대로 사랑의 대상이  이들의 역할도 따로 있다. 바로 현상 이면의 본질을 보는 일이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사랑에서 우러나왔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에서 불안과 의심을 지우는 일이야말로 보다 고차원적인 사랑이라 믿는다. 의식적이고 고통스럽기만    과정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사랑은 더욱 단단영글게 된다고. "너도 부모가  보면  거다" 한창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던  엄마가  말이다. 그러나 이젠 세상에  보지 않아도   있는 것들도 존재한다는  안다. 사랑하는 마음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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