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주 Jul 09. 2021

팔천 원과 팔만 원

청년의 시간은 소중하다면서


방학을 맞이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차피 늦잠을 자며 시간을 허비할 바에는 오전 아르바이트를 구해 하루 루틴의 중심으로 삼자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마음처럼 쉽게 되진 않았다. 피크 타임에만 반짝 일을 하는 탓에 일은 매우 고됐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한두 시간은 기본으로 쉬어줘야 할 정도로 체력이 많이 소진되는 일이었다. 뜨거운 음식을 양 손에 들고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면 이내 땀이 턱 끝에 모여 뚝뚝 떨어져 내렸다. 더운 날씨에도 마스크를 써야 하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시급은 팔천 얼마였다. 최저시급이었지만 개근하면 주휴수당이 지급돼 1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일을 떠올리면 한참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노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억울함은 얼마 전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하며 증폭됐다. 1시간 상담을 받는데 내는 돈은 팔만 원으로, 비싸지만 이마저도 시가(市價)의 절반 수준이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마다 이상한 습관이 생긴다. 다른 작가들의 글에서도 여러 번 읽은 내용이기에 아르바이트를 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라 예상된다. 바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금액을 시급으로 환산해 따져보는 버릇이다. 시간을 화폐로 사용하던 영화처럼 이 아메리카노는 내 30분, 이 파스타는 내 2시간, 이런 식으로 따져보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손님이 루이 마티니라는 와인을 주문했다. POS에 찍어보니 무려 9만 5천 원짜리 와인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할아버지는 내가 사흘을 꼬박 일해야 살 수 있는 와인을 반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며칠 간의 노동이 완전히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화폐 단위가 변하며 마인드가 변했다. 별생각 없이 하던 지출에도 언짢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며칠  일이 평소보다 늦게 끝나는 바람에 상담에 10 정도 늦은  있다. 바쁘게 움직이는  다리만큼 머리도 빠르게 돌아갔다. 1시간에 8 원이니, 10분에 1 3 . 환산하면 무려 1시간 30분어치 시급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날  돈의 절반을 날리는 셈이었다. 그러자 마음이 인색해지며 과연  상담이  돈만큼의 효과가 있는지 묻게 됐다. 누구는 허리가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녀도 팔천 원밖에  받는데 누구는 시원한 방에서 말을 듣기만 하며  배를 번다고 생각하니 견딜  없었다. 그동안 말은 내가  하지 않았는가. 지난번엔 중간에 하품까지 하지 않았는가.  순간 상담사가 어떻게든 상담 일수를 늘려 돈을  받아내려는 속물로 보였다. 결국 그날 이런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하는  보니 매번 받는 질문인 듯했다. 마지못해 그의 대답에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은  들어갔다. 이렇게 돈을 버는 당신이 부럽습니다. 어른들은 청년의 시간은 소중하다면서   시간은 팔천 원밖에 되질 않나요?


노동의 값어치를 정당하게 환산할 순 없을까 고민하다 문득 피카소의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이 피카소에게 찾아와 자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다. 피카소는 몇 분만에 슥슥 스케치를 해내고는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여인이 항의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몇 분 밖에 안 걸렸는데 왜 이렇게 비싸죠?" 그러자 피카소는 답했다. "당신을 이렇게 그릴 실력을 얻기까지 40년이 걸렸습니다." 투입한 시간만큼 숙련도가 오르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 모든 노력만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은 일화였다. 상담사는 오랜 시간 공부를 한 끝에 이 직업을 얻었을 테다. 당연히 내담자보다는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전문성이란 일종의 연금과 같았다. 현재를 희생해 미래를 얻는 이 시대에 만연한 등가교환 중 하나다. 하지만 청년의 시간은 오직 그것을 희생할 때 가치를 갖는다. 현재를 온전히 누리고자 하는 청년의 시간은 언제까지나 팔천 원짜리다.

작가의 이전글 아프지만 사랑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