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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Jul 25. 2021

구독을 원치 않습니다

종이신문 해지 방어팀에게 시달리다


읽지도 않을 종이신문을  구독했냐고 묻는다면, 옷걸이로 전락한 턱걸이 바와 라면 받침으로 전락한 어법서를 보여주며 이와 비슷한 이유라고 답하겠다. 무언가를 지를 때의 마음은   훗날 멋있어진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법이다. 사은품으로 제공된 블루투스 스피커를 볼모로    구독을 해지할  없다는 말을 들을  리는 차갑고 냉철한 논객이 되어 대중의 우매를 대적하는 모습을 그리는 중이었다. 담당 직원의 안내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정기구독의  속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성장이란 건, 먼치킨류 애니메이션에 늘 나오는 것처럼 달력이 넘어가는 장면과 오버랩되며 순식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바라던 모습이 되기 위해 매일 몇 시간씩 신문을 읽고, 분석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재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뒤늦은 깨달음의 대가는 매달 통장에서 무심하게 빠져나가는 정기 구독료였고. 내야 할 돈을 내지 못해 담당 직원의 독촉 전화를 받게 된 날, 나는 구독 해지를 결심했다. 당시 내 옆에는 펼쳐보지도 않은 새 신문이 80부 정도 쌓여있었다.


"안녕하세요, 종이신문 정기구독을 취소하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네 잠시만요, 담당 부서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담당 부서란 언론사에서 구독 해지를 원하는 독자를 회유하기 위해 마련한 해지 방어팀이었다. 호탕한 웃음이 무기인듯한 중년의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구독 해지가 순조롭게 이뤄질 줄 알았다. 일 년 약정 기간이 끝나기도 했고, 여기는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언론사 중 하나 아닌가. 하지만 마치 화난 친구를 어르고 달래듯 말 끝을 길게 늘이는 그 직원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가는 길이 들어오는 길만큼 쉽진 않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 년만 더 구독을 해주시면, 저희가 경제지를 추가로 넣어드릴게요."

"에이 영어 공부도 하셔야죠~ 영어 신문도 넣어드릴 수 있는데."

"종이신문만 원하시면 저희가 따로 금액 지원도 해드리고 있거든요."


뭐야 이게. 해지 방어팀의 달콤한 회유가 거듭될수록 고민이 더해지기는커녕 그동안 생돈을 헌납했다는 기분에 더없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걸 다 주고도 일 년 구독이 언론사에 남는 장사라면, 그동안 나는 얼마나 바가지를 쓴 거란 말인가. 구독 해지를 시도하지 않은 독자는 받을 수 있는 걸 못 받은 채로 정기 구독료를 내야 한다는 건가.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마트 출구에 할인 쿠폰을 비치하는, 그런 알량한 수법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튼 내 단호함이 쉽게 흔들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낀 듯, 저 쪽에서도 전략을 바꿨다.


"여기서 구독을 끊으시면 저희 팀 인사 평가에 반영 되거든요."

"다 이러시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어요."

"한 번만 저 좀 도와주세요."


담당 직원이 갑자기 개인적인 사정을 내세웠다. 뜻밖에 들이닥친 간절한 부탁에 당황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건가. 하지만 가만 들어보니 어딘가 엉성했다. 따로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이 역시 매뉴얼에 명시된 회유의 기술 중 하나라는 걸 직감했다. 능숙한 말솜씨에 넘어갈 뻔했고, 한번 더 이 지난한 싸움을 할 뻔했다. 이때쯤 피로감은 절정에 다다랐다. 나도 다른 카드를 준비해야 했다. 대나무처럼 맞서길 멈추고, 갈대와 같이 그녀의 말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마지막에 구독을 더 하겠냐는 물음에만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알겠습니다. 6월 말 구독 해지 신청 넣어드렸습니다."


... 내내 친구 같고 다정하던 그녀의 말투가 순식간에 프로페셔널로 변했다. 끝까지 죄책감을 심어주기보단 이렇게 마무리 짓는 편이 나았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는 . 며칠 뒤에 한번, 몇 주 뒤  한번. 무려  번에 걸쳐 해지 방어에 맞서 구독 방어를 해야 했다. 물론 마지막으로 내게 전화한 직원은 반쯤 체념한 상태로 단호한 의지를 재확인했을 뿐이지만. 끝없는 회유에 진절머리가 났고, 과도한 감정 노동이   알면서도 팀을 운영하는 본사가 야속했다. 원하던 바를 이루긴 했지만, 모두에게 상처만 남은 승리였다.




얼마 전 메이저 언론사에서 종이신문 발행부수를 뻥튀기하다가 덜미가 잡힌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팔지 못한 지면을 타국에 헐값으로 넘기거나 태워버리는 식으로 처리해 발행부수를 유지하던 신문업계 관행이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언론사가 이런 치졸한 사기극을 벌이고, 해지 방어에 사활을 거는 이유가 궁금했다. 발행부수가 언론사의 힘이라고는 하나, 사행산업이 돼버린 종이신문 대신 다른 방면으로 활로를 찾으면 안 되나. 결국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한국ABC협회(신문잡지부수공사)가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종이신문 시대의 종막이다. 파행으로 치닫는 신문업계를 목전에 둔 이젠 꿈이 기자라는 말도 무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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