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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Oct 16. 2021

모나지 않은 돌

다음 발에만 집중하면 돼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묵직하게 해낸 기억이 별로 없다. 성향 탓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비참한 줄 알지만 그럼에도 인생 전반에 걸쳐 도전과 도망이 반복되는 걸 보면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지만 공들여 유지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성향은 나를 포기하고 수습하는 걸 더 잘하는 용두사미형 범재로 키웠다. 나이가 들면 알아서 책임감도 커지고 맡은 일을 완수할 힘도 생겨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책임감보단 위기의식, 절박함 같은 게 생기며 버티는 시간이 더 길어졌을 뿐이다. 이번 가을에도 당찬 포부와 함께 대외활동을 시작했지만 아무런 결과물을 내지 못한 채 그만뒀다. 담당자에게 또다시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이젠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뒤따르는 질책을 참는 일도 그랬다.


무슨 일이든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성향 탓에 나는 어느 쪽으로도 날카롭지 못한 사람이 됐다. 이 사회에서 모나지 않은 돌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애써 부정하며 관성에 몸을 맡겼다. 그런 자신을 나무라는 대신, 끈질긴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뤄낸 이들을 폄하하는 편한 방식을 택했다. 전문성의 종말을 말하는 영상들이 내 방패였고, 통섭을 말하는 서적들이 내 갑옷이었다. 독서불패라는 한물간 문구로 자위하며 지식도매상 같은 허황된 꿈을 좇기도 했다.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읽은 것도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탕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 내 안에 놀라운 능력의 씨앗, 잠재력이 숨어있고 그게 싹틀 일만 남았다고. 그날이 오면 암울한 이 상황도 한방에 뒤집히게 될 거라고. 심지어는 정상적인 궤도로부터의 이탈이 씨앗의 발아를 위한 최적의 조건일지도 모른다는 처절한 낙관론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몸부림들도 다가올 심판을 얼마간 미룰 뿐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은 모난 돌이 돼야 했다.


인생에서 견디기 힘든 몇 가지를 안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그동안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일, 또다시 불확실함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일, 언젠가는 멀어질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가장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일, 또래보다 한참 뒤처진 채 더 어린 이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려나는 일, 내 안에 보물이 있다고 믿었으나 실은 발에 채이는 흔한 돌멩이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는 일 등. 고통에도 층위가 있다면 그런 아픔으로부터 얼마 높지 않은 곳에 궁극적인 아픔,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고통이 많았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일이 그중 하나였다. 아름다운 청년의 시절을 허비하고 후회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다시금 노력해보려 하지만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었는지 모르는 일이 또 다른 하나였다. 필연적인 도태의 과정에서 더 많은 층위가 만들어질 것이었다. 고통의 스펙트럼, 그 폭의 두께만큼 어른이 되는 건지도 몰랐다.


두 달 정도 진로상담을 받았다. 네 인생에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며, 부모님도 흔쾌히 비싼 돈을 지불했다. 나는 상담사로부터 내 상황에 대한 공감과 위로, 이를 극복할 명쾌한 해답을 듣길 원했다. 하지만 상담사는 도돌이표처럼 정면돌파를 강조했다. 허황된 꿈을 꾸지 말고, 당신이 지금 해야 하는 일부터 잘하라고. 나는 내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어려움에 부딪히고 극복한 경험이 장기적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거라 했다. 어영부영 도망치려는 내게, 이대로라면 나중에 어떤 인생을 살지 뻔히 보여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공포 마케팅 즈음으로 치부했지만 요즘에는 상담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끈질기게 무언가를 이뤄내는 힘, 그 지구력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고.


어제는 친구들과 한강변을 달렸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출발해 서강대교를 따라 밤섬을 가로지르고, 마포대교를 건너 돌아오는 코스였다. 체력 좋은 친구들에 한참 뒤처지며 마포대교를 달리는 마지막 구간은 혼자서 달리게 됐다. 멀리 여의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회사의 이름이 박힌 휘황찬란한 건물에 불 켜진 사무실들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그 안에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자기만의 '엣지'를 만들어낸 사람들, 모난 돌들이 들어있을 터였다. 그 웅장함 앞에서 다시 덜컥 겁이 났다. 언젠가는 나도 저런 건물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도 갈아서 날카로운 면을 만들고 그 쓸모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핑계와 변명을 집어치우고 마지막 정면돌파를 할 힘이 내 안에 남아있을까. 그때 앞서 간 친구가 나를 데리러 돌아왔다. 등에 얹힌 손에 밀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음 발을 내딛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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