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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Nov 14. 2021

주장과 주관에 관하여

무엇이 건전한 토론을 만드는가


학보사 기자로 일하며 쓴 기사 중 제일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으라면 지난해 정부와 의료계 사이의 갈등을 다룬 기사를 꼽겠다. 취재 중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지만 양측의 주장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은 '의사 정원 확대'였다. 의료계는 더 이상 의사 수를 늘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반대로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집단 모두 주장에 대한 탄탄한 근거를 제시했다. 의료계의 총파업 예고로 갈등이 급하게 봉합되며 씁쓸한 뒷맛을 남겼지만 두 집단의 토론은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


먼저 정부가 제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4명(한의사 포함)으로, OECD 평균인 3.5명을 크게 밑돈다. 하지만 무려 14년간 지속돼온 의과대학 정원 규제로 인해 지방 소도시는 여전히 인력 수급이 더딘 상황이다. 지난해 코로나19가 대구·경북을 강타했을 때에도 의료 공백으로 이미 한차례 홍역을 치르지 않았는가. 외과, 산부인과 등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종사하는 사람이 부족한 비인기 과목에 대한 대안도 마련해야 한다. 의사 수를 늘리지 않는다면 다가올 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


반면 의료계의 입장은 이렇다. 의사 1인당 연간 외래진료 횟수, 환자 1인당 진료 횟수, 건강 지표(기대수명, 암사망률) 등 '의료접근성'을 기준으로 삼으면 한국은 OECD 최상위권 수준이다. 정부가 제시한 OECD 통계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또한 의사 수를 늘리려는 이유는 지역 의료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함인데 대체 어떤 의사가 의료 수가가 낮은 지방에 병원을 차리겠느냐. 당신이 산부인과 의사라면 연간 출산율이 200명도 안 되는 군소도시에 병원을 열겠느냐. 문제는 의사 수가 아니다. 수가를 올리는 일이 급선무다.


두 집단의 주장과 근거를 들어보니 어떤가. 취재를 마친 뒤에도 나는 좀처럼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둘 다 맞는 말이어서. 모두 '팩트'를 토대로 빈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일도양단으로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없는 문제라 결론을 내렸다. 특히 한국의 의료 수준을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진단한 대목이 인상 깊었다. 두 집단 모두 OECD 통계를 인용했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삼냐에 따라 함의하는 바가 180도 뒤바뀌었다. 이들 사이의 토론은 어떤 자료가 현실을 잘 드러내냐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팩트와 또 다른 팩트의 대립이었다.


비즈니스 전문가 헥터 맥도널드는 저서 『만들어진 진실』에서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진실은 여러가지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어떤 사실을 어떻게 편집하냐에 따라, 또 어떤 스토리를 부여하냐에 따라 다른 진실이 탄생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진실이 서로 경합한다고 말한다. 토론이라 하면 상대방의 예상을 뛰어넘는 '폭탄' 한 방으로 합죽이를 만들어버리는 장면이 연상되지만 대부분의 토론은 지루한 평행선을 달리다 끝난다. 이는 토론이 진실과 비진실의 다툼이 아닌, 만들어진 진실들의 경합인 까닭이다.


이처럼 토론은 팩트들 간의 대립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팩트'로 인정하는가. 팩트는 검증된 사상이자, 상호 합의가 이뤄진 공리다. 위 예시에서 의료계는 '의사 수가 많아지면 수도권 의사 포화 현상이 가중된다'고 주장했다. 정부 측은 이를 받아들인 뒤 포화 현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지역의사제(면허 취득일로부터 10년간 지역 의료기관에서 의무 복무해야 하는 제도)'를 제시했다. 의료계도 이를 인정한 뒤 10년 후 벌어질 문제를 새롭게 지적했다. 어느 쪽도 팩트를 부정하지 않았다.


위에서 소개한 사례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밝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토론이다. 범위를 넓혀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토론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가. 우리 일반인들도 의견을 가질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뒷받침되는 근거가 부실하기에 주관과 주관의 대립이 되고 만다. 학창 시절부터 주구장창 주장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배웠지만, 근거는 늘 간과된다. 팩트가 부재한 토론은 말다툼이 되고 만다. 토론은 더 나은 대안과 상호 발전으로 이어지나 말다툼은 상처만 남긴다.


물론 요즘에는 집필 인구가 증가한 탓에 주장-근거 형식에는 모두가 익숙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근거를 사실이 아닌 경험으로 채운다는 데 있다. '내가 해보니까, 이게 맞다'는 식의 논증법이다. 그러나 경험은 가장 주관적인 논거다. 한 사람의 경험이 보편적인 합의로 이어지기까지 수많은 문턱을 거쳐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무시하고 경험이 사실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으니 '너는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라는 등 상처만 남는 말싸움이 자꾸 벌어지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주의자 벤 샤피로가 '백인 특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흑인 국회의원에게 한 말이 이를 잘 드러낸다. 한 유튜버의 번역을 다듬어서 옮긴다.


"만약 당신이 우리 모두가 함께 찾고 싸울 수 있는 인종차별 사례를 인용한다면 저는 기꺼이 그들의 옆에 서서 같이 싸우겠다는 답을 드릴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당연히 같이 싸워야 할 일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당신이 '그냥 백인 특권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해'라고 말한다면, 그냥 태어날 때부터 피부색 때문에 어떤 특권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이 사람들한테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넌 내가 겪어본 걸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너의 관점은 가치가 낮아'입니다. 그건 정체성 논쟁이자 특징적 논쟁입니다. 절대 합리적인 정치 반론이 아니에요. 그냥 불리할 때 무기처럼 사용하는 핑계나 마찬가지죠. 저와 토론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건전한 토론을 만드는 일에 있어 중요한 건 합의된 토대를 다지는 일이다. 만약 상대방이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가져와 근거라고 주장한다면 합의는 일어날 수 없다. 당연히 이후의 논의도 불가능해지게 된다. 우리가 전문가의 말이나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인용하는 건, 이들의 주장이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받아온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토론의 참여자들도 이를 인정할 확률이 높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해야 할 의무가 부여된다. 토론이 어려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건전한 토론은 양측의 배려와 지난한 노력을 늘 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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