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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Nov 16. 2021

구관이 명관인 이유

새로 부임한 리더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내가 상병을 달았을 때 중대장과 행보관이 우리 부대에 새롭게 부임했다. 중대에서 가장 파워가 센 두 간부가 바뀌는 건, 일개 병사의 입장에서는 군 생활이 통째로 바뀌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나이도, 외모도 전 중대장, 행보관과 비슷해 보였지만 통솔 방식은 드라마틱하게 달랐다. 그들은 그간 융통성 있게 넘어가온 일들에 '법과 원칙대로'라는 팻말을 붙였다. 특히 새로 부임한 행보관은 군법의 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규정 준수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그날 밤 이발소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세탁기는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갔다. 병사들의 입에서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정말 구관이 명관이었을까. 전역한 뒤 곰곰이 생각해본 바로는, 새로운 간부들의 부임 전과 후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병사들의 입장에서 익숙하고 낯설고의 차이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과정이 불편했을 뿐이다. 그동안 함께 호흡하며 쌓아온 전통이 몽땅 날아갔으니 고통스러운 건 당연지사. 하지만 단지 과도기적인 진통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그들이 병사들을 대하는 방식에 기선제압, 일부러 더 엄하게 보이려는 태도가 묻어있었기 때문이다. 꼭 구관이 명관이라는 볼멘소리를 들어야겠다는 듯 그들은 호통일색으로 병사들을 다그쳤다.


굳이 병사들의 미움을 사려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 년간 학보사 편집국장 자리를 맡아보니 얼추 짚이는 구석이 있다. 내 전임 편집국장은 자타공인한 '명관'이었다. 처음에는 원칙을 강조하며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고, 이후 조금씩 나사를 풀며 지친 팀원들을 위로했다. 팀원들과 호흡을 맞춰가는 모든 과정이 완벽했다. 큰 흐름을 볼 줄 아는, 그런 훌륭한 리더였다. 하지만 나는 첫 단추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전임자의 색채를 지워내지 않고 나사 풀린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욕을 안 먹기 위해,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간은 전략이 먹혀들었다. 융통성 있고, 팀원을 배려하고,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일군 리더로 칭송받았으니.


하지만 좋은 시절은 얼마 가지 않았다. 학보사의 업무가 원활히 이뤄지려면 규율과 원칙대로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 존재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엄하게 다스리는 일, 실수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일 등이었다. 급하게 스패너를 잡아당겼지만 한번 풀린 나사는 좀처럼 조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정은 처음부터 엄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일보다 고통스러웠다. 나에게도, 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리더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알아서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다그쳐야 하니 괴로웠다. 팀원 입장에서는 원래대로 잘하고 있는데 리더가 자꾸 뭐라 하니 혼란스러웠다. 버티지 못하고 관두겠다는 팀원이 나온 뒤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행동경제학 분야에서 이뤄진 일련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득보다 손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를 '손실 기피'라 부른다. 이는 조직을 다루는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처음에 원칙을 강조하고 나중에 융통성을 발휘하는 건 이득의 메커니즘이다. 당장은 너무 힘들지만, 다음에는 좀 더 편해지리라는 믿음을 갖고 버티게 된다. 반면 처음에는 잘만 봐주다가 나중에서야 나사를 조이려는 건 손해의 메커니즘이다. 결과적으로 업무 강도의 평균값은 동일하지만 후자의 경우 업무 부담이 훨씬 높게 다가온다. 나는 이 사실을 뒤늦게 배웠다. 그 결과 팀원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하나둘 떠맡아온 일들로 인해 더는 못 버틸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따라서 구관이 명관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신관 역시 명관이기 때문이다. 만약 리더 자리에 올랐을 때 주변에서 칭찬만이 들린다면, 한 번쯤은 전략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 바짝 나사를 조일수록 나중에 쓸 카드가 많아진다. 나무 대신 숲을 보고 호흡을 길게 내쉬어야 한다. 명관이라는 말은 마지막에 듣는 걸로 족하다. 어차피 사람들은 당신의 뒷모습만을 기억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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