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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Dec 10. 2021

무너진 이대남의 상징

이세돌의 패배와 노재승의 패배


5년 전 이세돌 9단이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3연패를 당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마음속에도 모종의 좌절감이 피어올랐다. 바둑과는 아무런 연이 없던 사람들에게마저 그러한 감정이 전해진 건, 이세돌 9단에게 부여된 상징성 때문이었다. 단순한 이벤트 매치에서 시작된 둘의 대국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빠르게 인간의 자존심을 건 대결로 비화했다. 이세돌은 바둑계를 넘어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추대됐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향해 갖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을 모두 알파고 속에 욱여넣고, 이세돌 9단이 이를 호기롭게 부숴주길 고대했다. 때문에 이세돌 9단은 3번째 대국 직후 자신의 패배에 대해 사과해야 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무력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고,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의 패배지 인간의 패배가 아니라고. 상징의 힘은 사람들의 감정을 좌우할 만큼 강력했다.


이대남(20대 남성)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은 건 지난 4월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직후였다. 압도적인 득표차로 패배한 민주당은 패배의 원인으로 이대남의 표심 이탈을 꼽았다. 무려 70% 이상 표가 오세훈 후보에게 쏠리며 참패를 견인했다는 평가였다. 이후 이대남은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했다. 이들의 일탈로 쏠쏠한 이득을 본 국민의힘은 본격적으로 이대남-친화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탈을 완전한 이탈로 바꾸고, 충심을 굳히기 위해 필요한 건 상징성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준석 대표를 내어놓았다. 늙고 낡은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분노한 이대남들의 기수로 삼기에 그만큼 적절하고 유능한 인물은 없었다. 하지만 이준석 대표 역시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을 넘긴, 잔뼈가 굵은 기성 정치인이었다. 새로운 세력을 담아낼 새로운 그릇이 필요했다. 검은색 비니를 쓴 채 열정적으로 연설을 토해내는 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일요일(5일) 국민의힘 선대위는 30대 청년 노재승 씨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다. 노재승 씨는 비록 이대남은 아니었지만 국민의힘이 바라오던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오세훈 후보의 유세트럭에 올라 거침없이 분노를 쏟아내던 모습은 그들의 인식 속 이대남의 이미지와 완벽하게 호환했다. 이준석 대표 역시 노재승 씨를 영입한 날 '그(보궐선거) 이상을 기대해도 좋다'며 상징의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행은 고작 나흘 만에 무산됐다. 과거 노재승 씨가 SNS에 내뱉은 망언들이 물의를 빚으면서다. 5·18 민주화운동을 폄하하고, 검정고시 응시자를 싸잡아 비하하고, 재난지원금을 개밥에 비유하고. 그의 저급한 망언들은 지지자들은 물론 그를 영입한 고위관계자들에게도 당혹감을 줬다. 결국 노재승 씨는 자진사퇴했다.


나흘간의 동행 끝에 남은 건 이대남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였다. 노재승 씨만의 편협한 사상은 이대남을 아우르는 세대 정신이 돼버렸다. 이제 우리는 그의 유산을 의식적으로 걷어내면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항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상징성의 폭력을 받게 된 것이다. 정치권은 제멋대로 이대남을 정의했고, 이대남의 표상이라며 부적절한 인물을 내세웠다. 잘못은 노재승 씨한테도 있지만, 사태의 책임은 상징성의 무게를 간과한 당에 있다. 필요한 대로 이대남을 부려먹다가 무고한 청년들의 얼굴에까지 먹칠을 한 그들은 최소한 사과라도 해야 했다. 오늘의 패배는 노재승의 패배이지 여러분의 패배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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