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오웰식 언어는 정치권에서 자기 진영에 유리한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해 사용하는 정치적 수사다. 때로는 말장난처럼 비치기도 하고, 때로는 정교한 프레임짜기로 드러나기도 한다. 오웰식 언어라 불리는 이유는 조지 오웰의 역작 『1984』에서 신어를 만들어 국민들의 사고의 폭을 좁히려 한 빅브라더의 행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쓴 조지 레이코프는 오웰식 언어의 예시로 과거 부시 정권의 핵심공약이었던 '세금 구제(Tax Relief)를 꼽는다. 증세와 감세는 가치중립적인 정책인데도 부시 정권은 구제라는 단어를 넣어 증세를 주장하던 진보 정권을 악으로, 자신을 그들의 음모로부터 국민을 구할 구원자로 교묘하게 선동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전략이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정비 사업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부는 '4대강 살리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그 힘은 막강했다.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은 '4대강을 죽이자는 거냐'는 비판에 부딪혀야 했다. 합리적인 토론은 말살됐다. 언어는 정말 사고의 폭을 좁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오웰식 언어 남용과 프레임 짜기는 곳곳에서 자행된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N번방과 같은 사태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한다. 또한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기업이 안전관리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다만 그렇다고 내가 'N번방 방지법' '포괄적 차별금지법'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동의한다는, 혹은 동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안에 법안의 이름이 내포하는 목적을 넘어선 의도와 독소조항이 담긴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을 두고는 특정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중대재해처벌법을 두고는 범죄 구성 요건이 모호해(충실하게, 적정한 등의 표현이 많아) 부주의로 인한 사고 역시 기업이 책임지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오웰의 언어들은 그런 합리적인 비판도 주저하게 만들었다.
입법 과정에서 오웰식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논리적인 토론이 오가야 하는 담론장은 도덕적인 책망과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는 투견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를 낼 경우 가중처벌을 하도록 한 법안도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아이의 이름을 붙인 탓에 공론장으로 끌어내지 못했다. 되려 운전자들의 아우성만 사고, 법을 장난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의 이름은 더럽혀지고 말았다. 물론 입법자의 선의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악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이상은 위헌적인 수준의 과도한 권리 제한을 주문하는 행위의 토대가 된다. 며칠 전 윤창호법(도로교통법 제148조의2 제1항)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무리하게 법안을 통과시켰다가 폐지되며 오히려 음주운전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듯한 꼴이 돼 버렸다. 법조계는 국회의 무분별한 입법 강행을 비판했다. 이성보다 감정을 앞세운 입법은 안 하니만 못했다. 오웰식 언어를 전면에 내걸고 법안을 밀어붙이는 행태에 대한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어제부터 N번방 방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오웰의 언어를 극한으로 활용해 밀어붙인(N번방을 방지하겠다는 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나) 법안에 대한 비판이 뒤늦게 제기되는 중이다 우선, 과거 테러방지법을 국민사찰법이라 명명하며 세계 최장기록(8일) 필리버스터로 저항하던 민주당이 비슷한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비판이다. 일단은 오픈채팅 단체이용방만이 검열의 대상이지만 한번 법이 제정된 이상, 보다 쉽게 세부 내용을 변경하며 검열 범위를 늘릴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법안의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의 목소리도 나온다. 범죄의 수단으로 이용된 건 해외기업의 앱(텔레그램, 디스코드)인데 애먼 국내기업만 제재한다는 비판과 불법촬영물이 아닌 이미지를 올렸는데도 제제를 당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한 네티즌은 전체 이용가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이미지를 프로필에 올렸다가 임시정지 조치를 당했다며 분개했다. 법의 문제보다도, 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담론이 형성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그 중심에는 오웰의 언어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두 진영이 뚜렷하게 양분된 우리나라에서는 입법의 성패가 곧장 진영의 승패로 치환된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물리학이 눈부신 발전을 보였듯, 오웰의 언어가 점점 교묘하게 발전해가는 양상도 첨예한 진영 다툼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 수사의 발전이 오히려 사회에 해를 끼친다는 점이다. 이미 아름답고 숭고한 이름을 가진 법안들이 그렇지 못한 방식으로 시민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숱하게 봐왔다.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이제는 진부해진 격언이 떠오른다. 선의로 범벅된 오웰의 언어가 어느 때보다 많이 보이는 지금,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