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깐돌이를 살려내어라
별명이 깐돌이였단다. 한시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법이 없어서 지어준 별명이었단다. 깝죽대는 꼴이 볼썽사납다가도 끝에 헤죽 웃어 보이면 차마 마음이 풀어져버리니 그보다 덜 앙증한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단다. 요새는 하도 움직이질 않아 비대해졌지만서도 한때는 깐돌이란 이름에 꼭 맞게 방정맞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그러곤 열두 살이었다지, 아마두. 깐돌이가 팍 죽어버린 게.
부쩍 어두워진 얼굴이 예사롭지 않았단다. 처음엔 늘상 붙어 다니던 아이와 다툰 줄로만 알았다구. 그런데 당분간 잘만 붙어다니는 걸 보고는 다른 까닭이 있겠다고 짐작을 했더랬다. 하루는 수저도 제대로 안 들고 내내 토라져 있길래 작정을 하고 물었단다. 요즘 학교서 무슨 일 있느냐구. 누가 못살게 굴진 않느냐구. 아이는 머리를 가로젓고는, 그날 짝꿍이랑 장난을 하다 불려 나갔는데, 짝꿍은 곧장 돌려보내고 자기만 혼내더랬다. 요즘 선생님이 자기만 미워한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더란다.
학부모 모임에서 슬쩍 떠본 뒤에야 그 이유를 알았단다. 현우 엄마는 촌지를 안 내었냐구. 그 여자 악질인 걸 아직도 듣질 못했느냐구.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얼마라도 찔러 넣어보라구.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 얼마 안 되어 자리를 빠져나왔단다. 부랴부랴 당시 유행하던 시집을 구해 결코 얇지 않은 봉투를 끼웠단다. 실내화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 쥐어주고는 서너 번 당부해서 보냈단다. 그렇게 깐돌이를 되살려 내었다구. 간만에 웃는 모습을 보고는 또 미안해서 한참을 울었다구.
정확히 삼학년인지 사학년인지 기억 안 난단다. 허나 그년 성이 최 씨였다는 건 분명하더랬다. 고집스런 면상에 사각테 안경을 얹은 모습두. 당장에라도 달려가 한따까리 하고픈 마음 굴뚝같았으나 주변서 이치가 그래먹은 걸 어쩌겠냐구, 말리는 바람에 참을 수밖에 없었단다. 관서에 투서라도 넣어볼 걸 후회도 된다구. 이듬해 아이를 맡은 담임은 촌지를 단박에 거절했단다. 이러지 않아도 잘 돌보겠노라고 약속했더랬다. 그래도 아이가 오면 얼굴빛이 어떤지부터 확인하던 버릇은 어찌할 수 없었다구.
이제는 저를 낳았을 나이가 되었음에도 내 얼굴이 유달리 어두운 날엔 촌지 봉투가 눈앞에 어른거린단다. 한낱 푼돈을 위해 아이를 볼모로 잡던 선생들이 많았단다. 제 탐욕을 위해 한사코 아이를 망쳐놓던 행실이 참으로 몹쓸다구. 영문도 모른 채 저가 뭘 잘못했는지 발발 떨었을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다구. 어느샌가 교사들을 은혜로운 스승(恩師)이 아닌 먼저 태어난 자(先生)라 부르는 게 다 그런 몇몇 작자들의 탓이 아닐 수가 없다구.
Title Image by giftpundits on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