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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Mar 18. 2022

불행을 취재하는 괴로움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환자의 어머니인듯한 보호자의 문자를 받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오후 녘의 나른함이 순식간에 걷히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답장을 해야 하는데 손가락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문자를 돌리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다만 취재라는 고상한 명분 뒤에 숨어 모른 척했을 뿐이다. 내가 한 짓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에 내몰린 이들에게, 누구나 답을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너무 뻔해서 무례하게 들릴 법한 질문들. 이를테면 수술을 마치고 사경을 헤매는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에게 지정헌혈이 얼마나 간절한지 묻는, 그런 질문들.


하지만 그렇게 후회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얼른 취재를 마감하고 보고를 올려야 했다. 퇴근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지정헌혈 대기자들의 멘트를 구해야 했다. 어떻게든. 답장을 보내는 대신, 다른 지정헌혈 대기자의 연락처를 받아 적고 문자를 돌렸다. 원하는 답변이 나올 때까지 돌리고  돌렸다. 내게 필요한 , 헌혈 부족 사태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지정헌혈을 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있는 사례였다. 지정헌혈 앱에는 헌혈을 요청하는 글이 하루에 열댓 개씩 올라왔고, 글에는 보통 연락처도 기재돼 있었다.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마음을 졸였을 그들에게 나는 마구마구 문자를 보냈.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지.


인턴기자의 취재란 정해진 이들에게서 정해진 이야기를 듣는 게 대다수다. 선배기자가 전문가들의 연락처를 주고 이런이런 방향으로 멘트를 받으라고 지시한다. 그러면 그렇게 하면 된다. 일반 시민들의 멘트를 따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일이 있었는데 뭐가 불편했다, 정부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등등. 원하는 답이 나오도록 질문을 미세조정하며, 급할 땐 지인의 입을 빌려 멘트를 급조하기도 한다. 인턴 수준에서는 가벼운 아이템 위주로 다루게 되므로 보통은 묻는 쪽도, 답하는 쪽도 부담이 없다. 문제는 남의 불행을 들쑤셔야 하는 경우다. 인턴기간 중 두 번 정도, 불행을 취재하는 괴로움을 맛봤다. 위 사례가 첫 번째였다.


퇴근하는  환자 어머니에게 답장을 드렸다. "알겠습니다. 경황없이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따님께서  이겨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수술이 끝난  인터뷰를 받겠다고 했고, 나는 정중히 취재가 끝났다는 사실을 일러드렸다. 이날 나는 지정헌혈이 간절한 환자 보호자 예순 명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하지만 훗날 기자가 되면 이보다  어려운 일도 해야 한다는  안다.


빈소 취재라는 게 있다. 현직 기자로 일하는 중학교 선배에게 들은 이야긴데, 이름처럼 빈소를 찾아가 유족들에게 멘트를 따오는 류의 취재를 말한다.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이 줄었다는데, 원래는 사회부를 기피하는 이유 1순위일 정도로 악명이 높다고 했다. 유족들에게 말도 못 붙여보고 쫓겨나는 건 다반사고, 화난 유족이 아예 데스크에 따지는 경우도 많다고. 오죽하면 빈소 취재 노하우가 나돌 정도라고 하니 (먼 친척들을 위주로 먼저 공략한다 등등) 그 난이도가 어떨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선배들은 그런 취재를 기어이 해냈다. 그리고 그 동력은 언론의 대의명분, 즉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함이라는 마음가짐에서 나왔다.


이전 취재의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오기도 전에, 또 다른 불행 취재가 시작됐다. 내가 구해야 하는 사례는 문재인 대통령 재임기간 집값이 올라 올해부터 국가장학금 수혜액이 줄어든 대학생들의 사례였다. 당장 등록금을 낼 방법이 없어 일용직 알바를 해야 한다는 학생. 다자녀인데 장학금이 모두 끊겨 막막하다는 학생. 촘촘히 나뉜 분위만큼이나 불행의 스펙트럼도 다양했다. 그들을 일일이 찾고 이야기를 듣는 과정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이게 다 뭐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가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녔고, 그럴 때마다 나도 저 명분에 매달려 동력을 부지했다. 다 사회를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짓이라고 말이다.


한 달간의 인턴기자 활동으로는 알 수 없었다. 정말 이런 걸 한다 해서, 불쏘시개로 애써 덮어둔 불행을 마구 들쑤신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곳이 되는지는. 많은 사람의 이목이 몰리지 않는 한, 기사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고 휘발된다. 언론사마다 하루에 수백 개, 많으면 수천 개의 기사를 출고하는데 정작 사회를 움직이는 건 그중에서도 극소수이지 않은가. 나머지는 오직 발행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건데, 그렇게 본다면 언론의 '명분' 역시 힘을 잃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괴로움만 안길 걸 알면서 불행을 취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아직 모르겠다.



Title Image by pixel2013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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