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우주 Mar 17. 2022

주 기자 매혈(買血)기

 공익적 목적으로 윤리 취재를 하는 겁니다


"500ml 한팩에 백만 원이요? 그렇게는 안 돼요. 아무리 싸게 불러도 사백은 넘어요."

"다른 분이랑 이미 백에 하기로 했는데요."

"정말 그 값에 해주신대요? 이쪽도 시세가 있는데."

"댓글 남긴 사이트에 같이 올렸던데. 이분 톡 아이디도 나와있으니 확인해보세요."

"일단 제가 구한 분한테 물어볼게요. 근데 백에는 절대 안 해줄 겁니다."


-불법 혈액 매매 브로커와 한 통화 中


발단은 친구의 대수롭지 않은 제보였다. 백신 미접종자인 지인이 수술을 받았는데, 백신 접종자의 피를 수혈받는 게 무서워 주변의 또다른 미접종자에게 지정헌혈을 받으려 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처음 들었을 땐 별 특이한 사람이 다 있네, 하며 흘려넘겼다. 하지만 비슷한 사례가 있나 이곳저곳 검색하던 중, 혈액을 불법으로 매매하고 이를 알선하는 듯한 댓글을 발견했다. '미접종자 수혈합니다, 부자만 연락 주세요' '30대 미접종자 남성 당장 수혈 가능합니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대충 돈만 받고 도망가는 신종 사기일 테지. 다만 다음 보고로 올릴 만한 게 없었기 때문에 급한 대로 '헌혈 부족에 불법 매혈도 늘고 있다'는 야마로 발제를 냈다. 선배는 발제가 좋다며 취재를 더 해보라고 지시했다. 그 말은, 직접 연락을 해보라는 말이었다.


혈액 매매 댓글을 읽으면서 두 후보를 추렸다. 한쪽은 전화번호를 공개했고, 다른 한쪽은 카카오톡 아이디를 올렸다. 좀 더 만만한 쪽부터 취재를 시작했다. 카카오톡 아이디를 검색하자 평범한 계정이 나왔다. 프사도 무난했고, 실명을 숨기지 않았다. 이건 무슨 배짱이지. 일단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무작정 들이대는 건 위험했다. 그쪽에서도 최소한의 검증을 하려 들 게 분명했다. 상황을 잘 설정하고, 연기를 잘해야 했다. 지정헌혈 앱을 설치하고 배경조사를 했다. 나는 곧 백신 부작용으로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할아버지의 손자로 둔갑했다. 입원한 병원은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부모가 어떻게든 미접종자 지정헌혈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상황. 오케이. 준비를 마치고 메시지를 작성했다. 중간중간 맞춤법 실수도 잊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급하게 지정헌혈이 필요해 톡 드려요. 할아버지가 백신 맞고 급성백혈병 판정을 받앗어요 O+형 혈액이 필요하고, 접종은 안 햇어야 해요. 지정헌혈이요 부탁드립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금액은 얼마 가능하신가요?"


이런 젠장.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세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다. 터무니없이 낮게 불렀다간 거래가 불발될 테고 높게 불렀다간 시세가 얼만지 알아낼 수 없을 터였다.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고, 먼저 제시를 해달라고 말했다. 그쪽에서 100만 원을 불렀다. 흥정을 해보려 했지만 실패. 호구 티를 내지 않으려 선금 비율이 얼마인지 물었다. 그는 선금으로 70만 원을 달라했다. 일단 부모와 상의해보겠다고 말한 뒤 선배에게 보고했다. 선배는 이게 단순한 보이스피싱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요한 문제였다. 형태만 달라진 보이스피싱이라면 굳이 기사화할 필요 없이 신고를 하면 됐다. 저들이 돈만 들고 도망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보장하는지 떠볼 필요가 있었다. 빠르게 전략을 짜고, 다시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부모님이 금액은 알겠다고 하시는데, 이게 사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물으시네요..."

"못 믿겠으면 부산에서 저 데리고 같이 올라가셔도 됩니다."

"병원으로 직접 오시겠다는 건가요?"


남자는 진심이었다. 내게 필요한 건 매혈이 정말 이뤄질 수 있다는 정황상의 증거였고, 남자가 보여준 진심이면 충분했다. 다시 연락주겠다고 하고 톡을 종료했다. 두 번째로 접촉을 시도한 곳은 댓글에 전화번호를 남긴 쪽이었다. 메시지를 보냈더니 곧바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짜고짜 그는 환자의 상황을 조사했다. 어떤 병인지, 어디에 입원해있는지, 의사가 뭐라고 했는지 등등. 경찰이 아닌지 확인하는 절차인 듯했다. 이 시나리오는 미리 준비해뒀기에 당황하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쪽에서도 믿는 눈치였다. 의심을 거둔 그는 자신을 브로커라 소개했다. 합법적으로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혈액 판매자와 구매자를 매칭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상보다 체계적이었고, 규모도 컸다.


중요한 부분부터. 금액이 얼만지 물었다. 그는 전혈(500ml) 한 팩에 보통 사오백만 원 정도 한다고 했다. 옆동네에서는 천만 원에 성사되기도 했다면서. 미접종자들이 줄며 금액이 올라가고 있다는 배경도 설명했다. 일단 알겠다고, 부모님과 상의하고 연락드리겠다고 한 뒤 끊었다. 선배에게 보고했다. 선배는 브로커에게 전에도 이런 거래가 성사된 적 있는지,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추가로 물어보라고 지시했다. 다시 전화를 하라는 말이었다. 솔직히 '흥신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취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선 그곳에서 온갖 무서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걸 알아서였다. 인턴기자인 게 들통나면 어쩌지, 혈액 구매도 불법이라는 데 브로커가 너 죽고 나죽자로 신고하면 어쩌지. 이런 불안이 전해진 듯 선배가 덧붙였다.


"공익적 목적으로 윤리 취재를 하는 겁니다."


그날 밤 브로커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원래 혈액을 팔기로 한 분과 연락이 끊겨서 급하게 다른 분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상황이 급해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고 말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요. 걱정 마세요." 다음날 오전 브로커는 혈액을 팔겠다는 미접종자를 구했다고 알려왔다. 평택에 사는 32살 여성이라는 사실도 말해줬다. 다음으로 중요한 건 절차였고, 우리가 합의한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나와 브로커, 여성이 평택역 쪽 헌혈의 집 앞에서 만난다. 나는 돈을 브로커에게 주고, 여성은 내가 알려준 환자번호로 지정헌혈을 한다. 끝나면 나는 헌혈증을 받고, 여성은 돈을 받는다. 브로커는 중개수수료를 뗀다. 당연히 직접 만날 생각은 없었기에 이쯤에서 슬슬 도망칠 각을 봤다. 다른 쪽과도 연락이 돼서 흥정하는 중이라고 했다.


위의 사례들과 전문가의 멘트, 혈액관리법 정리 내용을 버무려 발제를 올렸다. 지면에 실리는 건 물론, 톱(상단)에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날 하루는 부족한 취재를 정신없이 보충해야 했다. 지정헌혈을 애타게 기다리는 환자 보호자들에게 전화해 멘트를 받고, 매혈 브로커와의 연락도 매듭지었다. 그는 계속 뜸을 들이는 내 태도가 답답한 듯 짜증도 냈지만, 다른 경로로 피를 구했다고 하자 쿨하게 다행이라며 덕담을 건넸다. 그렇게 취재는 모두 종료됐고, 다음날 지면엔 아래의 기사가 나갔다.


인턴기자의 발제가 사회면 톱에 오른 감동적인 사건 


인턴기자의 신분으로 발제부터 최종적으로 지면에 올라가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본 건 큰 행운이었다. 발행되는 과정에서 재밌는 비하인드도 뒤따랐다. 우선 발행하기 전 혈액관리본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신문에 내면 곤란하니 내려줄 순 없냐고. 하지만 선배는 내가 딴 녹취록과 캡처본을 제시했고, 그러자 그쪽에서도 별말 없이 수긍했다고 한다. 나는 지상파 방송국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SBS 모닝와이드팀이었는데 혹시 취재처(브로커)를 어디서 찾았는지 공유해줄 순 없겠냐는 요청이었다. 선배는 내가 낸 발제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고, 나는 순순히 모든 전말을 알려줬다. 다만 아직 방송에 안 나온 걸 보니 그들이 신문을 읽고 사업을 접은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만약 맞다면, 선배가 말한 '공익적 목적'은 달성한 셈이겠다.


이상, 주 기자의 다이내믹한 매혈기였다.



Title Image by Belova59 on Pixabay

작가의 이전글 다하지 못한 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