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특기되는 순간
한국에서 체스를 두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태 반반한 통계도 안 나온 걸 보면 얼마나 마이너한 취미일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전국의 대학들이 연합해 연맹을 구성, 부원을 모집했는데 그 수가 100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마저도 호기심에 찔러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직장인으로 범위를 넓혀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자녀에게 체스를 가르치려는 부모들이 많아지며 수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지만,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또 그중 일부는 자녀의 학습 능력을 높이기 위해 억지로 배우게 하는 형국이다 보니, 한국 체스계의 앞날이 마냥 밝다고는 못하겠다. (체스와 지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로서는 지능이 높으면 체스를 잘할 확률이 높지만, 체스를 배운다고 똑똑해지지는 않는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아무튼 나도 이 마이너한 취미를 가진 사람 중 하나고, 언젠가는 외국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이 되길 바라는 쪽이다.
며칠 전 오프라인 체스대회에 출전했다. 참가비가 비싸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지만, 못해도 좋은 경험일 거란 생각으로 참가를 결심했다. 대회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준프로 레벨인 U2000 부문과 아마추어 레벨인 U1400 부문으로 나눠 각각 선수를 받았다. U2000 그룹에는 18명, U1400 그룹에는 48명의 선수들이 이름을 올렸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진행 방식은 스위스 라운드 방식으로, 승자는 승자끼리 패자는 패자끼리 붙여 7라운드 동안 따낸 승점으로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한판 진다고 탈락하지는 않지만, 연승을 할수록 더 어려운 상대와 붙게 되므로 입상 난이도는 토너먼트 방식에 견줄 수 있었다. 상은 1등부터 5등에게까지 주어지며 3등 안에 들면 상금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취미로만 체스를 즐겼고, 대회에는 처음 참가하는 입장이기에 입상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대회는 토요일 오후, 분당 한국잡월드에서 열렸다.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많은 선수들이 등록을 마친 뒤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가 없어 애매한 자세로 서성이다가, 안내에 따라 대회장에 입장했다. 넓은 강당에 수십 개의 테이블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체스판과 시계가 세팅돼 있었고, 선수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보온병에 담아온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천천히 대회장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열리는 대회라 그런지 다들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난해? 너가 왜 U1400에 있어!" 상위 그룹 선수 중 하나가 하위 그룹 쪽에 앉은 선수를 향해 외쳤다. 그럼 그렇지. 이번 대회엔 공식적인 레이팅 확인 절차가 없었다. 상금이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하위 그룹에 위장 잠입해 상금을 타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시작 전부터 힘이 쭉 빠졌다. 아까운 내 참가비. 그런 비양심적인 선수들이 얼마나 많을진 모르지만, 그저 만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말을 들은 선수는 순위에 들지 못했다)
내 1라운드 상대는 다소 긴장한 표정의 또래였다. 그는 오프닝을 무난하게 끌어갔지만 미들게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며 빠르게 무너졌다. 가볍게 1승. 2라운드 상대는 대회에 참가한 최연소 선수 중 하나였다. 경기 중반까지 전세는 비등비등했지만 꼬마가 전술 하나를 놓치는 바람에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그렇게 2승. 문제는 세 번째 상대였다. 보통은 대회 전 침묵을 지키는 게 관례이나, 그는 대뜸 온라인 레이팅이 몇 점이냐며 물어왔다. 그의 레이팅은 나보다 300점이나 높았다. 심리전이 주무기인 듯한 그는 미들게임에서 미끼를 던지고는 실수인 척 한숨을 내쉬며 나를 현혹했다. 독이 든 미끼였으나, 정말 실수인 줄 알고 덥석 물어버리고 말았다. 패배는 아팠지만 그때만 해도 입상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개의치 않았다. 정신을 가다듬은 뒤 다시 대회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세 판을 내리 승리했다. 상대는 점점 강해졌는데 전략들이 기적처럼 통하며 승점을 따낼 수 있었다. 마지막 7라운드를 앞두고 내 승점은 5점. 순위권이었다.
마지막 상대는 웃는 인상이 보기 좋은, 통통한 꼬마였다. 꼬마의 승점은 4.5점이었고, 순위권에 들려면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반면 나는 무승부만 해도 입상할 수 있었다. 물론 진다면 입상은 물 건너가기에 마냥 편한 마음으로 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최대한 안전하게 경기를 풀어나가려 했고, 꼬마는 예상한 대로 공격적으로 나왔다. 경기는 비숍 대 룩 엔드게임으로 전개됐다. 내게는 룩이 없는 대신 통과한 폰이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승부. 두 번 정도 무승부를 제안하며 그를 떠봤지만 꼬마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에는 사이좋게 같은 실수를 범하며 무승부로 끝났다. 그렇게 모든 일정이 종료됐다. 내 최종 전적은 5승 1무 1패. 대회에 처음 참가한 뉴비로서는 좀처럼 이루기 힘든 쾌거였다. 최종 순위는 4위였다. 3위부터 상금이 주어지기에 마지막 무승부가 아쉽기도 했지만 배부른 소리였다. 취미로만 즐기던 내가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대회 상품으로는 상장과 체스세트를 받았다. 4만원에 달하는 참가비를 고려하면 본전을 뽑은 정도였지만, 단연히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보단 나았다. 더 좋은 건 따로 있었다. 이제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취미, 더 나아가 특기라고 할 만한 게 생긴 것이다. 그동안 시간을 들인 게 헛되지 않았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됐다. (취업할 때 스펙으로 쓸 수 있는지 알아보려 한 건 비밀) 아무튼 이렇게 자랑만 늘어놓고 끝내려니 뒤통수가 아린다. 끝으로, 혹시라도 이 글을 읽을 한국 체스계 종사자분들에게 한국 체스계가 왜 발전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단견을 전하고자 한다. 꼴랑 상 하나 탔다고 제언을 해대는 모습이 꼴사나워 보일지 모르나, 앞으로도 체스를 즐기고픈 사람으로서 할 말은 해야겠다.
한국에서 체스가 비인기 종목이 된 이유는 하나다. 해도 너무 비싸다. 이번 대회만 해도 참가비가 4만원, 경기당 5천원 수준이다. 그나마 비공식 대회라 그렇지 공식 타이틀이 붙으면 판당 1만원에서 2만원 대국비를 내야 한다. 여전히 귀족들의 놀이로 인식되는 이유다. 지난해 대학체스연맹이 생길 때 건의한 부분도 돈에 대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연맹은 회원들에게 반기당 3만원의 회비를 요구했고, 나를 포함해 절반이 넘는 회원이 연맹을 탈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 체스계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건 좋았으나,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비용적인 면에서 진입장벽을 대폭 낮췄어야 한다. 사무실을 알아보고, 택시업체와 전속계약을 맺을 게 아니라. 코로나19 이후 해외에서는 체스 붐이 일었다. 체스 유튜버의 구독자 수가 100만명이 넘어가는 한편, 다른 분야의 유명 스트리머들도 대거 합류해 대회가 열릴 정도였다. 우리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퇴보를 거듭했다. 정녕 한국 체스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연맹을 이끄는 이들이 더 잘 알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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