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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Mar 15. 2022

발제 귀신이 나타났다!

인턴기자의 아이템 발굴신공


"선배님 오후 내내 준비했는데 마땅한 제 아이템을  찾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인턴기자로 일하는 동안 제일 힘들었던 건 발제다. 발제란 회사로 치면 윗사람들에게 하는 보고인데, 자신이 어떻게 기사를 내겠다는 걸 데스크에 알리는 행위다. 데스크는 올라온 발제들을 보고 어떤 기사를 지면에 넣을지 말지 결정한다. 발제가 지면에 잡히면 기자는 하루 동안 취재를 보강해 기사를 작성하게 된다. 기자에게 발제를 잘하는 능력은 필수다. 기사를 발행한 횟수가 곧 기자의 실적이 되기 때문이다. 발제를 잘한다는 건 왜 이게 기사가 돼야 하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는 뜻이다. 발제문의 형식은 부서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헤드라인과 야마(주제), 사례가 들어간다. 통상 헤드라인은 과감할수록, 야마는 명확할수록, 사례는 독특할수록 좋다. 보통은 어떤 사례에서 착안점을 얻어 발제를 키워나가지만, 반대로 먼저 각을 세우고 필요한 사례를 모으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일보 기자는 매일 오전 한 번만 발제를 한다. 하지만 인턴기자는 발제를 잘할 확률, 즉 '타율'이 낮기 때문에 하루에 네댓 번씩 발제를 하도록 지시받는다.


문제는 기사가 될 만한 아이템을 찾는 게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현직기자에게는 출입처가 있다. 정부부처나 국가기관을 드나들며 한 발 앞서 정보를 파내고, 기사화할 수 있다. 알고 지내는 취재원도 많다. '밥 한 끼에 아이템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취재원으로부터 얻는 정보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인턴기자들에겐 출입처도 취재원도 없다. 그렇다면 우린 어디서 기삿거리를 찾아야 할까. 처음에는 주구장창 커뮤니티를 돌았다. 맘카페, 자영업자카페, 심지어 백신미접종자카페에도 가입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커뮤니티 피드를 뒤지면서 요즘 사람들이 뭐에 관심을 갖는지, 어떤 불만을 터뜨리는지 모니터링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택도 없었다. 커뮤니티에서 도는 이야기들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이야기가 많았고, 그런 이야기들은 이미 다른 언론사에서 다뤘을 가능성이 컸다. 브런치나 정부 브리핑룸 등으로 채널을 넓혀봤으나 소용없었다. 희소성 있는 정보를 발견해 단독기사를 내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인턴기자에게는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


아무런 발젯거리를 찾지 못한 그날은 하필 부서가 바뀌고 선배기자와 처음 합을 맞춘 날이었다. 오후 내내 커뮤니티를 돌고 발제를 준비했지만, 부끄러울 정도로 준비된 게 없었다. "선배님 인턴기자는 대체 어디서 아이템을 찾아야 하나요?" 적반하장으로 되물었다. 그는 인턴에게는 많은 걸 바라지 않으니, 젊은 세대의 시각을 드러낼 수 있는 가벼운 사례들을 알아보라고 충고했다. 예시로 준 건 '민폐 취급받던 집들이, 2030에서 다시 유행한다' '1인가구 청년들이 반찬도우미를 많이 고용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었다. 덧붙여 커뮤니티만 돌지 말고,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어보라고 했다. 선배의 말이 맞았다. 대어를 낚고픈 욕심에 충분히 먹을 만한 고기들을 놓치고 있었다. 또한 인터넷이라는 개방된 공간에서 현직기자와 승산 없는 단독경쟁을 벌이려 들었다. 한마디로 나는 겸손하지 못했다. 인턴기자만의 역할과 방식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선배의 말에 따라 주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잊었던 명언이 떠올랐다. '기삿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퇴근하자마자 마루에서 TV를 보는 부모님께 아룄다. 혹시 뭔가 특이한 사례를 보고 들은 게 없는지, 요즘 주변에서 새롭게 유행하는 건 무엇인지 여쭸다. 친구들한테도 살포시 낚싯대를 드리웠다. 최근에 회사에서 무슨 일 없는지, 어떤 게 제일 힘든지를 물었다. 다음날 엄마는 명품 브랜드 종이쇼핑백을 코팅해서 에코백처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빠는 명품 신발 안 닳게 하려고 방역용 비닐덧신을 신고 다니는 지인의 이야기를 제보했다. 전자는 이미 ○○일보에서 다뤘고, 후자는 현실과 동떨어진 사례라 일반화하기 어려웠다. 친구들도 많은 아이디어를 내줬지만, 아쉽게도 살려낸 건 없었다. 기사를 내려면 갖춰야 할 조건이 많았다. 시의성, 중복성, 보편성 등 정말 다양한 이유로 발제가 잘렸다. 모든 조건을 고려하면, 이번엔 남는 아이템이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눈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머릿속은 다음 발제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했다. '발제 귀신이다!' 어느날 발제에 대한 압박으로 피폐해진 내 몰골을 본 친구가 말했다.


발제 귀신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노력했던 한 달. 그 성과는 내 이름이 바이라인에 들어간 두 개의 기사로 남았다. (그중 하나는 ○○일보 사회면 톱으로 올라가는 쾌거를 이뤘는데, 그 비하인드는 다음 글 '주기자 매혈(買血)기'에 담았다) 인고의 시간 끝에 얻은 건 그뿐인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걸 얻었다. 바로 '눈'이다. 기자는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직업이다. 다른 사람이 쉽게 불평하고 넘긴 일이라도, 기자는 한번 더 그 이면을 들춰봐야 한다. 더 거대한 무언가, 이를테면 정부의 정책이나 사회 현상으로부터 비롯된 불편은 아닐까, 하고. 사회의 병폐를 민감하게 캐치하고, 공적인 언어로 고발해 대안이 마련되도록 돕는 게 기자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인턴기간은 그런 눈을 길러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루는 엄마가 리필 샴푸통에 샴푸를 옮겨 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플라스틱 문제와 2030 친환경 트랜드 등을 엮은 발제를 떠올렸다. 골몰한 내 눈을 본 엄마가 한마디 했다. "이거도 기사로 쓰게?" 여기에 본질이 있다.



Title Image by Alexas_Fotos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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