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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우주 Apr 17. 2022

족보와 표절, 레포트

언어의 지뢰밭을 걷는 과학도들


한국에서 순수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실험 레포트의 고통을 모를 수 없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을 전공하는 학부생들은 여섯 번, 많게는 여덟 번까지 실험 수업을 들어야 한다. 실험만 한다면야 즐겁겠지만, 눈에 보이는 게 나와야 직성이 풀리는 집단의 특성상 반드시 레포트를 제출하도록 지침이 마련됐다. 이후 레포트는 중간 과정을 얼마나 잘 이행하는지 확인하는 단일 지표로 자리매김했다. 레포트 종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실험 전에 내야 하는 예비 레포트고, 하나는 실험이 끝난 다음 내는 결과 레포트다. 예비 레포트에는 실험 목표와 이론 등을 담아야 하며, 결과 레포트에는 실험 결과와 (학부생 따위의) 분석이 들어가야 한다. 


문제는 실험에 필요한 이론을 혼자서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목별로 교수가 지정돼 있긴 하지만, 실험실습은 전적으로 조교가 맡아 진행한다. 교수가 하는 일이란 이따금씩 얼굴을 비추며 다독여주는 게 전부다. 실험 이론이 쉽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전공과목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하는 건 물론, 지엽적인 내용도 많아 새로 공부해야 할 때가 많다. 아예 모르는 내용을 독학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대학은 취업을 위한답시며 물리학과 학부생에게 전자공학과 회로설계 실험을 듣게 한다. 공대생도 어려워하는 내용을, 강의 없이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달랑 1-2학점짜리 수업에 일주일의 절반을 쓴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먼저 실험의 고통을 경험한 선배들은 후배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족보'를 넘긴다. 어차피 실험 커리큘럼은 매년 같으므로, 선배들의 족보를 참고하면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은 공정성에 민감한 청년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실험이 얼마나 적폐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도 올해 처음으로 족보를 구했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며 쌓인 수십 명의 레포트가 폴더에 담겨 있었다. 신기한 건, 내용은 같은데도 문장이 제각각이었다는 점이다. 단어 배열을 바꾸고, 표현을 고친 흔적이 보였다. 알고 보니 모두 표절률을 낮추기 위한 방책들이었다. 조교들이 '족보 베끼기'를 막기 위해 표절 검사를 하는 까닭이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이공계열 학부생 수는 55만 명 정도였다. 공대와 자연대의 절반이 물리실험을 들으니 27만 명, 한 학년에 어림잡아 7만 명 정도. 단순 셈법으로 학기당 3만 명이 똑같은 실험과 이론에 대해 레포트를 제출한다는 뜻이다. 매년 수십만 장의 레포트가 비슷한 표절 검사기에 등록되고 누적된다. 그런 상황에서 백만 번째 레포트가 표절에서 자유로울 확률이 얼마나 될까. 보통 10-20%의 표절률은 용인되며, 기준은 매해 완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공계 학부생들이 앞으로 더 많은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언어의 지뢰밭은 갈수록 촘촘해지고, 젊은 과학도들의 한숨은 점점 짙어진다.


매년 연말이 되면 한국 순수과학에 대한 토론이 인터넷을 달군다. 노벨상 발표 시즌이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일본에서 수상자가 나온 탓인지, 개탄스러움이 진하게 묻은 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유야 많겠지만, 나는 오로지 통제와 실적만을 위한 레포트 제도가 순수과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자를 꿈꾸는 일부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레포트에 시달리다 전공에 대한 흥미를 잃고 만다. 학문의 체계적인 발전을 위해 도입한 레포트는 도리어 학계 진입을 막는 장벽이 되고 말았다. 유명무실한 레포트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실험이 전공과 괴리되지 않도록 과정을 바꾸고, 평가에서 정량적인 요소를 줄여 부담을 완화해야 한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필두로 한 4차 산업혁명이 모든 방면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순수과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 즉 공학의 토대가 순수과학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과학기술 선도 경쟁을 펼친 아마존, 테슬라 같은 대기업이 전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면, 과학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족보와 표절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아슬아슬한 콩트를 마냥 웃으며 지켜볼 수 없는 이유다. 



Title Image by  jarmoluk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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