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 물리 탈출 넘버원
중간고사를 망쳤다. '그래놓고 잘 봤을거잖아' 확신에 차 떠본 친구도 내 점수를 보고는 고개를 떨궜다. 네 과목 중 세 과목은 0점, 나머지 하나는 -5점이었다. (내 지도교수님은 '찍기'를 방지하기 위해 맞추면 5점, 틀리면 -5점 시스템을 도입했다) 달랑 이름과 학번만 적어서 낸 수준이었고, 빵점을 맞는 건 당연했다. 낮은 점수보다 괴로웠던 건 75분의 시험 시간이었다. 비대면 시험에서야 멍하게 시간을 때우면 되는데, 대면 시험에서는 교수님들이 돌아다니면서 푸는 모습을 일일이 확인한다. 공부를 안 한 학생에게는 끔찍한 악몽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지난주 대면 시험에서 그 악몽을 꿨다. 천천히 강의실을 배회하던 교수님이 내 옆에서 우뚝 멈춰섰다. 교수님은 한참 동안 내 답안지(백지)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뗐고, 다시는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원래라면 한창 침울했을 시기다. 시험을 망치면 학점은 고사하고, 당장 졸업도 불투명해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괜찮았다. 다음 시험 때 만회하면 되지, 통과 못하면 나중에 또 들으면 되지. 언론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전공과 학점에 초연해지는 법도 터득한 듯했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비록 공부는 안 했어도 부지런히 살았기 때문이었다. 진로와 관련된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중간고사를 앞두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데뷔했고, 한국일보 기획취재 공모전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며 강동구 전역을 누볐다. 원고지 매수로 60매(단편소설 분량이다), 녹음 분량만 24시간이 넘어가는 대형 과제를 혼자 끙끙 앓으며 완성해냈다. 이번만큼은 도망친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에 온전히 집중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여전히 졸업이었다. 에세이 '일간 이슬아'로 이름을 날린 이슬아 작가도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최하점만 맞자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슬아가 듣던 수업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진행됐고, 내가 듣는 수업은 외계어로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아래는 이번 양자물리학 중간고사 ①번 문제다.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닌데 해석이 안 됐다. 문제마다 새로운 문자가 등장했다. 같은 문자여도 대소가 다르고, 부호가 다르고, 첨자가 달랐다. 한동안 벙찐 표정으로 시험지를 바라보다가 문제만 그대로 베껴 제출했다. 졸업을 하려면 낙제점을 받은 과목이 있어선 안 됐다. 최하점(D-)이라도 받지 못하면 내년에 다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어떻게든 최하점을 받아야만 했다.
이른바 디마이너 프로젝트. 최하점을 받을 정도로만 공부하고 남은 시간은 진로 준비하는 데 쏟자는 나름 그럴싸한 계획이었다. 굴러서, 아니 기어서라도 완주하자는 목표였다. 문제는 낙제를 면할 수 있는 커트라인이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숨만 쉬어도 최하점을 주는 교수님도 있는가 하면 과제도 내고 시험도 웬만큼 풀었는데 F를 주는 교수님도 있었다. (지도교수님은 후자에 속했다) 매 학기 교수님들이 맡는 수업이 달라 기준이라 할 만한 게 정립될 틈도 없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눠봤다. 보통 학점은 세 파트로 나뉜다. 출결, 과제, 시험.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출결과 과제였다. 하지만 전공과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율이 대부분 시험에 몰려 있었다. 결국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한 문제만 맞히자, 라는 생각은 했으나 공부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시험 점수와 학습량은 정비례하지 않았다. ①번 문제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니 공부해야 하는 양은 비슷했다. 전공과목은 저학년 과목과 달리 족보도 없었다. 결국 한 문제라도 맞추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 미련 없이 포기했다. 처참한 점수에 놀란 교수님들의 호출이 이어졌다. 낮은 시험 점수에 대해 해명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면담이었다. 양자물리학 교수님은 ①번 문제를 완벽히 이해해 설명하면 최하점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명색이 물리학과인데 내용을 하나도 모르고 졸업하는 건 안 된다고. 또 공부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구실로 찾아오라고 했다. 교수님의 배려에 감동한 나는, 나머지 문제들도 모두 완벽하게 공부해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양자물리학 교수님 마음 속엔 제자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픈 마음과 전공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놓아주고픈 마음이 공존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 그걸 지켜보는 교수님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직 서너 번의 면담이 더 남아있다. 다른 교수님들도 융통성을 발휘해줄지는 모르나, 그 과정에서 위축될 필요는 없다. 진로를 바꾼 건 죄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이른 나이에 진로를 정하게 만드는 게 문제 아닐까. 졸업생의 절반이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 취업(한국개발연구원, 2020)한다고 한다. 빵점 맞은 주제에 뻔뻔하게 들릴지 모르나 달랑 50명짜리 수업에 면담 대상자가 열댓 명이나 있는 걸 보면 문제가 내게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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