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되는 잔돈에 유심해지기
얼마를 절약하느냐보단 얼마를 버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어릴 적 『부의 추월차선』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책을 읽으며 얻은 지론이었다. 대학생 때 암만 용돈을 모아봐도 직장인 한 달 월급의 절반만 못하다. 그러니 벼룩 간 떼먹듯 마음 졸이며 돈을 아끼지 말고 써도 된다고. 입사한 뒤 저축을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주변을 설득해왔다. 물론 저축의 중요성을 아예 몰랐던 건 아니다.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동기 중 하나는, '금연 적금'이었다. 한 갑에 4500원, 한 달에 16갑을 피우니, 한 달이면 7만 원을 절약하는 셈이다. 7만 원이면 괜찮은 신발을 하나 살 수 있는 돈, 술자리에서 호탕하게 한턱낼 수 있는 돈이다. 너무 궁상맞게 굴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막 낭비하기도 싫었다. 적당하게 쓸 건 쓰자는 주의, 이른바 '중용'의 정신이었다.
얼마 전 서울에 갈 일이 있어 광역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나 같은 분당구민이 한강 너머로 나가려면 반드시 붉은색 광역버스를 타야 한다. 분당선을 타는 방법도 있지만 너무 오래 걸려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다. 목적지는 신촌이었다. 다섯 대의 광역버스(9000, 9401, 1150, G8110, M4102) 중 하나를 타면 됐다. 마침 9000번 버스와 9401번 버스가 나란히 들어와 별생각 없이 9000번 버스를 탔다. 삑 소리와 함께 2800이라는 숫자가 화면에 찍혔다. 그날따라 그 숫자가 관심을 끌었다. G계열이나 M계열 버스가 비싼 건 알았지만 9000번이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다.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니 9401번 버스는 2300원이었다. 500원이나 차이가 났다.
물론 서비스의 질이 다르면 금액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십수 년간 두 버스를 타본 바, 차이는 없었다. 노선도 똑같았다. 나는 '순천향대학병원'이나 '남대문세무서·서울백병원' 정류장에서 내려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했는데 두 버스 모두 두 정류장을 지났다. 별생각 없이 먼저 온 버스를 탔기에 낭비된 돈, 무심함의 대가였다. 사람들이 9401번 버스를 향해 달려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남대교를 지날 때 9000번 버스가 9401번 곁을 추월해 지나갔다. 배가 살살 아파왔다. 해봐야 한두 푼(100~200원) 차이일 줄 알았다. 이제까지 대체 얼마를 낭비한 건지, 그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계산하려다 관뒀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약속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책을 읽으러 근처 카페로 갔다. 콜드브루 커피 일반사이즈는 4500원, 한사이즈 올린 건 5100원이었다. 목이 말라서 사이즈업으로 시켰다. 나갈 때쯤 컵에 음료수가 절반 남아 있었다. 그냥 일반사이즈로 시켰어도 마시고 남을 양이었다. 600원 차이였지만, 이미 버스요금으로 심란한 상황에서 더는 용서할 수 없었다. 내용물을 억지로 들이키고, 할 일 알림 앱에 '커피 사이즈업 X'를 입력했다. 그동안 욕심내 주문했다가 남긴 음식, 음료들이 머릿속에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나는 음식 양을 잘 못 맞췄다. '부족할 바엔 남는 게 낫다'는 엄마의 철학이 자연스레 내 안에도 있었다. 하지만 남는 건 낭비였다. 낭비는 싫었다.
현금이 카드로 대체되며 사람들이 지출에 무심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현금은 주고 나면 끝인데 카드는 다시 돌려받으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더해 후불교통카드를 쓰면 돈은 한 달 뒤에야 빠져나간다. 거부감은 덜해지고, 무심함은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심함의 대가는 적지 않았다. 미뤄둔 계산을 해봤다. 버스요금 차이는 왕복 1000원. 여기에 남은 음식·음료수를 1000원으로 치면 하루에 2000원. 일주일에 5일 나가니 한 주에 만 원. 한 달이면 총 4만 원이 된다. 일 년이면 48만 원, 십 년이면 중고차도 뽑을 수 있는 돈이 된다. 물론 할인 혜택을 꼼꼼히 챙기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최고의 절약은 낭비되는 잔돈에 유심有心해지는 일이다. 다음 버스 기다리기, 음료수 사이즈업 안 하기 등. 이래도 너무 궁상 맞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