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신용카드도 안 파본 내가
경제 서적은 살면서 딱 두 권 읽어봤다.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와 한때 히트를 친 <부의 추월차선> 정도다. 학창시절 이과를 선택했고, 대학에서도 이공계열을 전공해 한평생 경제학과는 담을 쌓고 산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경제관념도 전무한 수준이다. 빚지기도 버릇이란 생각에 여태 신용카드도 안 만들었다. 주식은 손도 안 댔고, 코인은 사행성이란 막연한 생각이 들어 멀리했다. 은행은 빳빳한 경조사용 지폐가 필요할 때만 들렀다. 월급 대부분을 만기 3년짜리 적금에 붓다가 생활비 대출을 받은 전력도 있다. 만약 알뜰한 경제생활에도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나는 아마 최하위권에 속했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경제부 기자로 발령을 받았다.
언론사에서 갑작스럽게 다른 부서로 발령받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인사 전 희망 부서를 조사하기에 전혀 상상 못했던 부서로 튕기는 일은 많지 않다. 난 그동안 경제부에 지원하지 않았다. 경제 문외한이 경제부에 간들 유용한 기사를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당장 DLS나 LTV 같은 기본적인 개념도 모르면서 정부의 금융 정책이 잘못됐다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도리에 맞지 않아보였다. 처음 인사 발령 결과를 듣고 종일 한숨만 나온 건 그래서다. 주변에서는 '하다 보면 된다'며 막막해하는 나를 위로했다. 한 달만 꾹 참고 버티면 괜찮아진다고. 하지만 다음날부터 전혀 새로운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짧은 기사를 배정받고 참고차 이전 기사들을 찬찬히 읽어봤다. 이런 문장에 맞닥뜨렸다. <자사주를 교환 대상으로 한 교환사채 발행은 교환권 행사 시 사실상 3자 배정 유상증자와 동일한 효과가 있는 만큼 기존 주주들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한참을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화면만 쳐다봤다. 교환사채도 모르겠고, 유상증자도 모르겠는데 둘이 동일한 효과가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지. 얼마 전에만 해도 사회부에서 누가 누굴 칼로 찔렀다, 유명인이 술 먹고 운전했다는 류의 기사만 보다가 이런 걸 보니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위에서도 들었는지 당분간 분량이 큰 기사는 맡기지 않겠다고 했다.
전혀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분야를 취재하게 되는 건 기자들의 안타까운 숙명 중 하나다. 젊을 때야 금방 배우고 적응할 수 있지만 더 나이 들어 생소한 분야를 맡는 건 너무 큰 고역이다. 반평생 사회부를 떠나 있다가 법원·검찰 담당 부서로 발령받은 고참 기자가 후배들한테 미안하다며 뒷머리를 긁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심한 경우에는 퇴사하기도 한다고. 그런 이유에서 기자에게 필요한 자질로 넓고 얕은 배경지식이 꼽히고, 기자를 뽑을 때도 신문방송학과보다 다양한 전공이 선호되는 거라 생각한다. 내가 막 입사했을 때도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를 인터뷰하느라 홍역을 치른 한 선배가 "드디어 이공계가 들어왔다"고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세상만사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기자는 많지 않고 대부분은 평생에 걸쳐 공부를 계속해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취재와 공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배운 건 잘 정리하는 일이다. 어쩌면 배경지식보다도 중요한 자질은 처음 접하는 내용을 빠르게 배워 흡수하는 능력이란 생각도 든다. 언제까지 한숨만 쉬고 있을 순 없으니 일단 서점에서 경제 서적을 몇 권 골랐다. 주식·코인 증권 계좌도 새로 만들었다. 조만간 신용카드도 만들어보려 한다. 업계 사람들과 점심 자리가 많아 무료로 '원포인트 레슨'을 들을 수 있는 점은 참 좋다. 서너 주 힘을 빼고 천천히 흐름을 익히다 보니 아예 못할 일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