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살살 아파온다
아빠는 어디가 아프다 하면 침부터 꽂았다. 손이랑 배는 기본이었고, 눈두덩이와 정수리에도 맞아봤다. 차라리 한약은 코를 막고 삼키면 그만이었지만 침의 고통은 피할 방도가 없었다. 특히 볼펜침(1초에 침을 다섯 방 꼽는 당시의 첨단기술)은 공포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넘어진 책상에 발이 찍혔는데도 울지 않은 것은 볼펜침의 잔상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리라.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생애 첫 거짓말도 '안 아파요'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침 맞는 건 질색이었다. 하지만 배가 아픈 경우만큼은 예외였는데, 명치를 따라 침을 서너 방 맞고 나면 마법처럼 아픈 배가 가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배가 살살 아파올 때면 아빠의 침이 생각나곤 한다.
"한의사는 다 돌팔이래~ 아.. 너희 아빠 빼고."
평소에도 선을 자주 넘던 친구가 던진 저 한마디는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다. 그 친구의 아빠는 정신과 의사였다(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친구들 앞에서 그 말이 날아든 순간 의사 앞에 붙은 '한' 자가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자란 시기는 IMF 직후 막 의사 열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영화나 드라마가 그리는 병원의 모습은 매우 정갈했지만 한의원은 이상한 향이 피어오르는 냄새나는 곳으로 비쳐졌다. 서양 의학은 진리로 받아들여졌고 한의학은 유사과학 정도로 치부됐다. 덕분에 하얀 가운의 의사가 처방전을 휘갈기는 모습은 뭇 아이들의 로망이 되었지만, 한의사는 그러지 못했다.
한의사를 향한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인해 치기 어린 자존심은 곳곳에서 구겨졌다. 한 친구는 중1 때부터 꾸준히 키가 크는 침을 맞았지만 효과가 없었다며 나한테 불만을 쏟아냈다. 그때마다 "너는 그거라도 해서 그 정도인 것"이라고 받아쳐야 했다. 기숙사에서는 졸지에 경락 마사지사가 됐다. 한 선배를 요절내고 싶어, 아빠한테 사혈(死血)이 어디냐고 물은 기억도 난다. 친구들은 '맛없는 한약 먹기'를 벌칙으로 정하고 게임을 했고, 그때마다 한약 포장지에 떡하니 박힌 아빠의 캐리커처는 비웃음을 샀다. 한의사는 항상 놀림거리였다. 그게 너무 싫었다.
어른이 되자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아빠의 직업을 말할 때마다 '이야~ 금수저네'라는 말이 사은품처럼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고 죄송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용돈이 빠듯했지만 비호감을 면하기 위해 지갑을 더 자주 열어야 했다. 너는 참 좋겠다, 부족함 없이 자라서. '빽'이 강조되며 나는 노력도 없이 거저먹는 인간으로 비쳐졌다. 자기들의 아빠가 한의사가 아니라는 사실로 자기네들의 게으름을 변명했다. 나는 아빠의 직업을 숨기기 시작했다. 아빠는 어느새 회사원이 돼있었다. 어쩌다 거짓말이 들통날 때면 한의원은 얼마나 작고 환자는 얼마나 적은지 둘러대기 급급했다.
한의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이런 철없는 마음을 알았을까. 아빠는 어느날 내게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빠는 열여섯 살 때 할아버지를 여의었다. 할머니가 작은 쌀가게를 하셨지만 다섯 남매를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에서 막내인 아빠는 항상 순위권 밖이었다. 그래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돈을 벌었고, 군의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떠밀려 입대를 했다. 가난한 페이닥터로 시작해 아파트 현관을 돌며 무료 왕진으로 환자를 모았고, 그 뒤로 3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했다. 그렇게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너희를 만날 수 있었단다, 라고.
인생의 수많은 굴곡을 버텨낸 한 사람이었다, 아빠도. 그런 그의 삶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아들이었다. 아빠는 어느새 늙어있었다. 희끗해진 머리와 깊게 팬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험한 세상으로부터 못난 아들을 지켜내며 얻은 상흔이었다. 정신이 들었다. 이제 돌려드릴 차례였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란 아빠의 직업을 인정하고 아들로서 마땅한 존경을 보내드리는 일뿐이었다. 얼마 전부터 한약을 냉장고에 한가득 쌓아두고 착실히 먹어나가고 있다. 먹다 보니 특유의 달달함이 나름 중독성 있다. 어렸을 땐 왜 그렇게 코를 막았나 싶다.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침도 한 방 놔달라고 졸라야겠다. 배가 살살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