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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Oct 15. 2021

오징어 게임. 6화 깐부.

생각나는 대로 리뷰.

#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넷플릭스 가입자임에도 불구하고 잘 들어가지 않는 편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도 거의 없는 편이고 규모에 비해 좋은 콘텐츠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주행한 넷플릭스 드라마는 "인간수업"이었다.  재밌게 봤고 인상적으로 본 드라마다. 오징어 게임이 하도 여기저기서 난리이길래 궁금해서  봤다. 

1화부터  6화까지  본 소감은 " 넷플릭스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흥행 할 작품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동시에 다음 회가 궁금해서 재생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는 거다. 물론 거실 소파에 누워 재생버튼만 누르면 다음 회차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건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의 장점이고 거대 자본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하여 여러국가에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장점이라 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은유로 가득한 이 작품이 영상 스트리밍 업체의 공룡 넷플릭스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딘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영화 '기생충'부터 '오징어 게임'까지 창작자들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오래되고 공고한 시스템에 대한 은유 또는 비판이 전세계인에게 공감받고 환호하는 이유는 이제  그 수명을 다 하고 있거나 한계에 봉착한게 아닐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 한게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는 술어 그자체라고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라고 믿는 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 일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수정되고 진화함으로.

두 작품(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체제하에 계급 중 일명 '루저'라는 하위그룹 간의 치열한 싸움이 이야기의 축을 이루고 있다. 거대 자본을 갖고 있는 소수의 부자들을 제외하곤 누구라도 하위그룹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사는 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라면 하위 계급간의 싸움은 대다수의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여지가 많기 때문에 창작자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인 것 같다.

무엇보다 대본과 연출의 압축미와 단순미가 돋보인다. 도형으로 이루어진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주요 무대인 세트부터 인물의 서사 또한 복잡하지 않고 단선적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와 달고나, 구슬치기등 게임 또한 한국 사람이라면 어릴적 한번쯤 해법을 만한 놀이에 해당된다. 매우 친숙하고 쉬운 게임을 통해 관객을 쉽게 작품에 몰입 시킨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 왜 루저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와 "게임의 방식"보다는 루저들이 어떻게 모였으며,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연대하는지에 집중한다. 이 방식은 매우 효율적이고 드라마틱하다. 그리고 복잡다단하지 않다. 매우 단순하고 일직선으로 향해가는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순간에 인물들의 서사를 조금씩 보여 주는데 특히 주인공 성기훈이 십여년전 자동차 회사의 노동쟁의때 눈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보여주는 회상씬을 삽입하는 정도의 장치로 이용한다. 이미 몇몇의 한국영화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쟁의와 용산 참사를 극의 소재로 사용한 적이 있기에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여타 다른 작품보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민낯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실제 사례라고 볼 수 있지만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의 차가움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6화까지 보고 글을 쓰는 이유는 6화 "깐부" 한 회만으로 '오징어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매우 훌륭히 말하고 있으며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한 완결성을 갖고 있어서다. 그리고 심지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6화의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당사자는 영감과 성기훈이 아니라 '워로맨스'라고 지칭할 수 밖에 없는 새벽과 지영이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6화 "깐부"는 여러 반전이 나오는 꼬인 실타래 같은 이야기의 연속이다. 팀 플레이로 알고 있던 게임이 실은 서로 싸워야하는 게임이었다는 것과 영감과 성기훈의 게임과 상우와 알리의 게임 그리고 마지막 깍두기 까지 하하. 그야말로 반전의 연속이다.

(마지막 깍두기는 정말로..기발하면서 참신하다. 게임에서 소외 된 사람을 깍두기라고 살려 두었던 어린 시절 골목의 아름다운 미덕. 감독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들을 과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챙겨주고 있나 묻고 있다.)




세트는, 영감이 과거를 회상 할 정도의 어린 시절 기억속, 동네의 작은 골목을 연상시키는데 시간은 딱 놀이가 끝나가고 집에서 엄마가 어서 들어 오라고 말하는 해질 녘, 그 시간이다. 골목을 붉은 노을이 감싸고 있고  곧 어둠이 동네를 뒤엎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두 소녀는 게임을 진행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영이라는 소녀는 대화가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럴 만도 한 게 지영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감옥에서 출소 한 지 얼마 안 된 사람 냄새가 그리운 사람이다. 새벽 또한 그녀의 제안에 퉁명스럽게 응한다. 참가자중에 유일한 또래여서 일 것이다. 먼저 말을 건넨 사람도 새벽이었다. 극중 성기훈의 대사처럼

"사람은 믿을만 해서 믿는 게 아니라 안 그러면 기댈 때가 없어서 믿는 거지"

사람은 항상 기댈 때를 찾으니깐. 특히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데스매치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지 않을까. 참 멋진 대사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여성의 대화는 남과 북의 물리적 위치만큼 서로의 사정이 극명하게 갈리지만 본질적으로 같다. 한명은 전염병으로 상징되는 후진국 그것도 지구상에 얼마 남지 않은 독재 공산주의 체제하에 궁핍하게 살며 인간다운 삶을 꿈꾸며 남으로 도망쳐 왔다. 어찌보면 지영은 새벽이 그토록 꿈꾸던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 사는 소녀,  일 수 있다. 아니 일 수 있었다. 성공이 행운의 연속적인 결과라면 오징어 게임에 모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연이어진 불행의 결과 일 수도 있다.

어찌보면 인생은 정말로 종이 한장 차이로 결정되어지는 데스게임 일 수도 있으니깐. 안타깝게도 지영 또한 새벽이 그리던 남한의 소녀가 될 수는 없었다. 목사라는 가면을 쓴 체 가정폭력과 강간을 일삼은 아버지를 죽이는 건 그녀 또한 꿈꾸던 삶이 아니었으니깐. 두 소녀는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영역 밖,부조리한 체제의 희생양이다. 소녀들은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는 주어진 상황속에서 거기에 굴복당하지 않고  어떠한 선택을 했다. 그리고  두 소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리는 서로 닮았다는 걸. 그러므로 마지막 지영의 양보는 가슴 시리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가고 그래서 더 슬프다. 다른 한편에서 남자들이 데스 게임에서 온갖 술수와 인간다움을 포기하며 살아남고자 발버둥 칠때 소녀들은 서로의 과거를 공유하고 이름을 주고 받는다.

 이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다. 솔직히 비현실적인 이야기 구조상 오버액팅은 어쩔 수 없지만,  두 배우는 담담하게 감정선을 유지한 체 마지막 절정에 다다랐어도 절대 분출하거나 오버하지 않는다. 끝까지 감정을 삭히고 쿨하게 웃으며 말한다. 왜냐하면 절망과 두려움의  끝에 가 본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 있어도 두렵지 않으니깐.그래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매우 훌륭한 연기였다.

두 여성의 연대는 냉혹한 오징어 게임에서 한낱 희망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인들 생명  앞에서 양보할 수 있는 위인이 있을까 싶지만 언뜻 보면  지영은 현명한 공리주의자  일 수도 있다. 어차피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목숨값의 가치는 누구에게 더 소중한 것일까. 

"오징어 게임" 6화는 1화부터 질주하던 속도를 줄이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극중 내내 얼음장 같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새벽이 지영의 죽음을 뒤로 하고 울며 걸어오는 장면은 6화의 가장 큰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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