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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Oct 18. 2021

소설<알쏭당>

지난여름

수술 날을 기다리는 심정은 처음엔 불안하지 않았다. 일주일이라는 남은 시간은 꽤 멀게 느껴졌고 개학을 며칠 남긴 초등학생 된 기분이랄까. 친구들과 지인들이 찾아오면 수술을 기다리는 암환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카페에 두런두런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 들었다. 태어나서 누군가가 내 얘길 그렇게 집중해서 오랫동안들어준 적은 없었다. 수술을 앞둔 환자에 대한 배려였겠지만 몸에 커다란 혹을 달고도 어찌 그리 신이 났는지 떠들어댔다.

"'기생충'은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야~원래 모든 문제의식은 예술가가 먼저 제기하는 거라고"

어떤 날은 학창시절 친구와 직장동료 그리고 과거 함께 연극을 했던, 지금은 대학로에서 잘나가는 연출가 친구가 한데 뒤섞여 있었다. 친구들은 이전보다 몸무게가 20kg 가까이 빠진 모습을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 할만도 했는데 그들의 연기력이 훌륭했던 건지 아니면 내가 떠드느라 눈치를 못챈건지,

"형이 회사에 오기전에 연극을 했었다고 말만 들었지~ 보질 못해서, 잘했어요?"

직장동료가 분위기를 바꾸려 연출가 친구에게 물었다. 설마 궁금해서 물어봤을까, 그냥 그만둬서 안타깝다고 해~ 해줘~ 잘했다고 해줘라. 연출가 친구는 뭘 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에 잠기는지..

"야! 너가 날 캐스팅 했음 그만 뒀겠냐?!"

아프다는 핑계로 평소 말못했던 진심도 면전에 대고 큰소리로 뻥뻥 치기도 했다. 학창시절부터 골골되던 절친

규호의 상체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건강미를 뿜뿜 내뿜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진 건 정말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쩌면 잊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항암치료 받은 기억은 애초에 없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술 전날에도 잠을 잘 잤다. 중대한 일을 앞두면 더 잠이 잘 온다는 가설은 학창 시절 시험 전날이면 평소보다 일찍 잠이 쏟아져 숙면을 취한다는 걸로 매번 증명되었다. 문제는 수술 당일 아침이었다.

전날 작성한 수술동의서의 내용과 더불어 공포와 불안감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개복 후 상황에 따라 수술이 불가할 수 있다. 다른 장기의 전이 여부에 따라 수술 진행이 변경될 수 있다.

성기능에 문제가 올 수 있다. 장기 전체를 절제해야 할 수 있다.'

복부에 암세포가 가득 찰 정도로 커져버려 MRI.PET CT를 찍어도 암세포가 최초 발현된 지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배를 갈라 육안으로 봐야 정확한 암의 이름과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삶이 가장 힘든 순간은 칠흑 같은 어둠 한가운데 놓여 있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 암담하다는 말, 어두운 곳에 외롭게 서 있는 그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 말이다. 8월의 강렬하고 따뜻한 해가 병실 창문을 통해 내리쬐고 있었지만 그날 아침만큼 인생에서 암담하고 불안한 날은 없었다. 간호사가 " 1시에 정확히 수술실로 가실 거예요"라고 말을 했다. 아직 몇 시간이라도 남아 있는 공백은 암흑 속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16살 때 이후로 신을 믿지 않았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일에 직면했을  때, 혹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했을 때 신을 찾게 된다고 생각한다. 갓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은  잠들기 전 진심을 다해

신에게 기도를 했지만 벗어나고픈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그 이후로 소년은 신 따위는 없으며 결국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딪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필요에 의해 신에게 잠시 기댄 것일 수 있다. 여러 세월의 겹을 지나 돌아보니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었고 행여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라 하여도 결국 행간의 숨은 의도에 맞닥뜨렸다. 신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병실에 누워 있다 보면 기도도 하고 포교활동도 겸하는 목사와 신부, 스님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지금, 며칠 전까지 와서 환자들 손을 잡고 주 예수를 외치던 목사라도 찾아오길 바랬다.  평소처럼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데도 없었다. 살려면 수술을 받아야 했으니깐.  

배드에 일어나 병실 앞으로 수액 거치대를 밀고 나가 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주 예수를 부르는 목사가 아니라 목탁을 두들기는 스님이 보였다. 처음 보는 비구니 스님이었다. 스님은 복도에서 목탁을 두들기며 다른 병실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복도 끝 나의 병실로 오기를 한참을  기다렸다. 스님은 무슨 일이 있는지 복도 끝 마지막 남은 병실을 지나쳐 계단으로 내려가려 했다.

"스님, 조금 있으면 수술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를 해주실 수 있나요?"

스님은 어떤 얘길 하려다 간절한 나의 목소리를 듣고는 마음먹은 걸 포기한 듯  매우 차분하게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두 손을 모은 체  경건한 자세로 병실로 들어와 배드 옆에 앉더니 누우라고 눈짓으로 말했다. 회색 도포에 갈색의 염주를 두른 비구니 스님은 긴 도포 속에 숨겨둔 고운 손을 끄집어내더니 내 손을

꼭 잡아줬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법문을 중얼거렸다. 생전 처음 듣는 법문은  마치 어릴 적 듣던 엄마의 자장가처럼 평온했다. 스님의 손은 생각보다 거칠고 투박했지만 내 손이 조막손이라고 느낄 만큼 커서 그녀의 손안에 포근히 안착한 것 같았다. 거짓말처럼 마음속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수술 잘될 겁니다."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비구니 스님의 기도 덕분이었을까. 1시에 수술실로 들어가 저녁때가 돼서야 나올 수 있었지만 다음 날 아침 주치의 의사는 "천운입니다~!" 라며 힘껏 외치며 들어왔다. 20센티라는 암세포에 비해 전이가 없었으며 대장과 소장을 절제하긴 했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복막이나 다른 장기로 전이돼서 고생을 했을 거라는 말도 함께.

의심이 많은 나는 의사가 병실을 떠난 뒤 간호사를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이 원래 약간 과장되게 말하시는 스타일인 가요?"

간호사는 두 손을 절래 흔들며 선생님이 저렇게 말하는 걸 처음 본다 라며 확인시켜 주었다.

환자 복을 들어 올려 배 한가운데를 가르는 스템플러 자국을 바라보았다. 촘촘히 찍혀있는 스템플러 자국을 보니 살아있다는 감정과 망가져버린 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올라왔다. 그런 감정은 마냥 기쁘지도 마냥 슬픈 감정도 아닌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살아있다는 환희를 느끼기 시작한 건 그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술 한 지 1년째 되는 날, 그날 아침 내 손을 잡아준 비구니 스님을 찾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차를 몰고 스님이 문자로 보내온 주소를 찾아 경기도 양평으로 갔다. 스님의 절은 우연히도 아프기 전 양평의 단골 카페를 갈 때마다 도로 옆으로 보이던 꽤나 커 보이던 절이었다. 병원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목사나 스님을 보면 자연스럽게 예전의 나를 떠올렸었다. 병원은 이미 아픈 사람들과 앞으로 아플 가능성이 높은 환자의 가족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으로 보험 설계사들이 환자의 보험에 대한 보상을 상담해주며 자연스럽게 가입을 유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재밌게도 나는 종교인의 포교활동과 가입을 유도하는 영업직을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평으로 향하는 이차선 도로 옆을 차지하고 있는 목조건물의 큰 절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했다. 비구니 스님도 수많은 신도들을 거느린 절의 주지스님인데 병원에 찾아와 목탁을 두드리는 모습으로 감히 실적을 쌓는 영업직과 비교를 했다니.

"어휴~ 이제 살도 붙고 건강해 보여서 좋네요~"

스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 주었다.

"스님, 절이 너무 이쁩니다"

진심이었다. 절은 도시의 절과 다르게 남한강과 푸른 녹음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앞마당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한 낮 더위를 식힐 만큼 시원하게 만발해 있었다. 절의 2층에는 스님의 거처가 있었고  안쪽에는 다도를 할 수 있는 내실이 있었다.

"차 한잔 하세요~치료가 언제 끝났죠?"

"실은 오늘이 수술 한지 1년이 된 날이에요"

"어머~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래도 이렇게 금방 회복된 거 보니 너무 좋네요"

병실 배드에 누워 있다 이렇게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스님과 차를 마시니 감회가 새로웠다. 스님은 그런 나의 심정을 알고 물어본 것일까.

"우리 스님은 아직도 아직도 거기 병원에 계세요.."

"네?"

"00 병원 항암 병동에 아직도 항암을 하고 계세요, 폐와 뼈에 전이가 되어서, 이제는 한 달에 두어 번 가지만..

그래도 살이 너무 빠져서 에휴.."

스님은 동료 스님의 병문안 차 병원에 간 김에  다른 병실의 환자들에게 기도를 해줬다고 했다.

"그날 거사님 병동에서 기도 해주다가 스님한테 전화가 와서 급하게 아래 병동으로 내려가다가 거사님을 만난 겁니다, 하"

아, 스님과의 만남은 종이 한 장 차이였구나, 스님은 열여섯 소녀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스님, 전 원래 무신론자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스님과의 인연은 소중했지만 종교가 주는 부담감은 미리 떨쳐내고 싶었다. 주말마다 나가야 하는 번거로움, 때마다 맞춰서 내야 하는  현금 같은 것 등 종교는 또 다른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제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매달 꾸준히 실적을 내야 하는 보험 일도 간간이 연락 오는 기존 고객들의 계약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편하게 지나가다 오늘처럼 들려요~"

스님은 웃을 때마다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갖고 있었다.

"저 스님.. 여기.. 당시 넘 경황이 없어서.."

수술 당일 날 스님이 기도를 해준 걸 뒤늦게 안 엄마는 기도비를 직접 드리는 게 예의라고 말했고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찾아뵙고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수술이 잘되어 건강하게 회복한 게 스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믿고 싶지 않지만 그리고 동료 스님의 병문안 차 들려 순수하게 기도를 해준 것도 알지만 무엇이든 대가는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첨엔 손을 벌려 괜찮다는 시늉을 했지만 거듭 내미는 봉투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요?"

"작년 항암이 끝나고 짧게 제주를 갔었는데, 그땐 워낙 몸이 성치도 않아서.."

"다시 제주를 가고 싶군요?"

미쳐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화들짝 반기며 자신의 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어디 있지.. 아! 여기 있네 하하"

스님은 법복을 손수 접어 일어나서 몸을 넘기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사진 속에는 나무로 만든 통나무 집 한 채가 있었다.

"이쁘지 않아요? 내가 동료 스님 몇 분이랑 연세(년세)를 나눠서 일 년살이 집을 구한 거예요"

이번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오름 펜션이에요~여기, 여기 보이죠? 오름? 올 3월에 계약해서 딱 한 번밖에 못 갔네요.. 다른 스님들도 다 바빠서.. 우리 거사님 한달살이 하려는 거 아니에요?"

한달살이.. 뭐 , 오래 있다 올 생각은 했지만, 한 달까지 살 생각은 없었지만...

"여기 가서 지내면 되겠네~어차피 놀리고 있어요, 한 달 살면 숙소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여기로 가요~"

"네?"

"잠깐만, 혹시 모르니 다른 스님들에게도 물어볼게요, 단톡방에서.."

스님의 폰 속에 있는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통이 큰 통나무로 만들어진 집은 튼튼해 보였고 뒤로 보이는 오름은 액자 속 그림처럼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9월까지 아무도 안 간다네, 돈만 내고 이거 원.. 여기 주소 줄게요~혹시 모르니 위치도 확인해봐요"

지도로 주소를 검색해보니 가고 싶었던 평대 해변과는 차로는 10분도 체 안 되는 거리였다. 영실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제주의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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