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목 Oct 20. 2021

소설<알쏭당>

산책

"오늘도 고라니 보러 가셨나요"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하하, 이제 나가려고요"

"과제는요?"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주말이 다가왔다. 전번 글 쓰기 모임의 주제는  "요즘 내가 관심 있는 것"이었고 이번 주의 주제는 "나의 꿈"이었다.  전번 수업 이후로 그녀는 내게 '고라니 마니아'라고 불렀고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고 했다. 핸드폰 문자 발신자는 '그녀'였다.

"낼 봐요~^^"

글 쓰기 모임에 나가라고 권유한 건 다름 아닌 영실이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몸은?"

한참을 있다 돌아온 답장은 변함없이  내용이었다. " 뭐 그럭저럭"이라는 같은 답장을 하기엔 나도 지친 걸까, 평소와 다른 답장을 보냈다.

"주로 산책을 하고 글을 쓰고 있어~"

항암 치료가 끝나고 유일한 낙은 산책 길에서 만나는 고라니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과 블로그에 끄적끄적 글을 쓰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아프고 나서의 가장 큰 변화는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는 일이었다. 주제는 정해진 게 없었다.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고, 방구석의 개미들과  사투를 벌이고 난 후의 감상을 블로그에 썼다. 아프고 나서의 변화가 아니라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사람과의 만남이 뜸해져서 일 수도 있었다. 인간은 누군가와는 소통을 하지 않으면 외로운 존재이고 인간은 외로움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회적 동물이니깐.

솔직히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그때 난 한참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을 들락날락할 때였고 집으로 돌아오면 방 안으로 들어가 음악을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다. 원래 불행은 나한테만 닥친다고 생각하면 억울하고 더욱 분한 법이니깐.

나만 병원 배드에 항암제를 꼽고 몇 박 며칠을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외출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상황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그랬으니깐.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경제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뉴스를 간간이 보았지만 적어도 그때  덜 억울했다.

"나도 요즘 돌아다니질 못해서 유일하게 하는 게 산책이야"

누구랑 해? 남자 친구가 생긴 거야?라고 물어볼까. 한참을 문자 창에 글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데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어떤 글? 소설?"

소설.. 헤어지기 전 영실에게 빌린 소설책이 떠올랐다. 침대 끝 선반 위에 올려진 "이상문학상".

영실은 매년 나오는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은 꼭 읽는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빌린 책 줘야 되는데"

이별을 고하고 그녀의 원룸을 나오면서, 그렇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두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화장실 칫솔 통과 책상 위의 작은 볼펜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정작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니 머리맡엔 그녀의 책이 있었다.

"안 줘도 된다니깐"

항암치료가 끝나고 책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만나자고 했을 때도 영실은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다 읽은 책이라고,

"소설은 아니고 뭐 그냥 끄적 되는 거지 뭐"

경로가 이탈된 대화를 다시 영실의 질문으로 돌아와야 했다. 영실과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걸까. 암에 걸렸다고 사람이 변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제 다시 만난다면 이전보다 영실을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꾸준히 써봐, 글쓰기는 산책의 또 다른 이름일 거야"

어? 아.. 그래. 영실은 가끔 저렇게 현학적인 말을 툭하고 던졌었다. 아니 철학적인 얘기라고 해야 되나.

"넌 어떻게 지내는데?"

"뭐 그럭저럭"

이번엔 내가 항상 하던 답장을 영실이 보내왔다. 오늘은 영실이 한가한 걸까. 평소와 다르게 답장이 금방 도착했다.

"글쓰기 모임 같은 거  한번 나가봐"

"글쓰기 모임?"

오랜만에 이어지는 문자가 마치 예전 사귀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한 설렘을 줬다. 하지만 짧았다.

나의 물음표에 영실의 답은 밤새 도착하지 않았다.


고작 일 년을 타지 않았을 뿐인데 십여 년을 출근길과 고객을 만나러 이동했던 지하철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다니 참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하철 특유의 냄새와 흔들리는 손잡이, '웅~'하고 달려가는 소리도 처음 듣는 것 마냥 생소하게 들렸다. 이제는 매일 만나는 팔당대교 아래의 강물과 숲이 더 친숙해진 걸까.

주말에 찾은 잠실역은 한가로웠다. 평일을 메우던 분주한 직장인들이 사라져서 일 게다. 하긴 강남역도 그랬으니깐. 강남역 회사 앞에서 영실과 일요일에 만났을 때 요란한 평일과 대비되는 스산함이 느껴졌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흰색 마스크에 제 얼굴을 숨기는 것 빼고는 달라진 것 없는 풍경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벌써 도착해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 역시 이미 도착해서 노트북을 보며 글을 마저 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경 렌즈 안의 눈짓으로 인사를 반갑게 했다.


"꿈과 목표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내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은 목표를 꿈인양 꿈을 목표인양 말한다. 난 그게 싫었다. 어느 직장에 취업하고 집을 장만하는 것이 어떻게 평생의 꿈이 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주로 직장인들로 이루어진 글쓰기 모임에서 가장 학생 같아 보이는 여자의 발표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의견들이 흘러나왔다.

"어떤 사람들에겐 직장에 취업해서 어엿한 사회 구성원이 되는 게 꿈이 될 수도 있죠"

"저도 님 글에 동감해요, 한국 사람들은 꿈이 너무 현실적이라 꿈이라고 말하기도 좀 민망할 때가 있거든요"

"저희 부모님은 평생의 꿈이 자기 집을 갖는 거였어요.."

평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주저하던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손가락으로 안경을 쓸어 올리며 말하자 흥미롭게 지켜보던 강사가 입을 열었다. (나도 여성의 의견에 동조를 표하곡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처음에는 다들 서로 눈치 보고 말씀들을 안 하시더니, 하하, 매우 고무적입니다. 글을 쓰고 나의 생각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알게 되는 것, 이게 어찌 보면 글쓰기의 순기능 중 소통에 해당될 거예요,

자 여러분도 지금 느끼셨겠지만 이렇게 꿈에 대한 각자의 정의가 달라요, 우리가 첫 번째 시간에 했던 게

'나는 누구인가' 잔아요, 그래서 꿈에 대한 대화를 하려면 우선적으로 꿈에 대한 정의부터 혹은 어디까지 꿈에 대한 범주를 정할 건지..."

강사는 몇 권의 책을 낸 기성작가였다. 작가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첫 만남부터 그는 솔직했다. 글은 취미로 하는 게 좋다. 가끔 등단 후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 그러면 안된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사는 건 정말로 어렵다. 나도 어렵다 등등.

강사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그녀에게 눈짓을 했다. 도와달라는 신호였다.

"꿈은 꾼다고 말한다. 꾸는 행위는 동사다. 어떤 행위다. 나라는 사람은 행위 이전에 어떤 존재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따라와야 꿈을 꾸는 행위에 대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태어난 이유 또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 같은 뭐 그런 것 말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사랑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 유일한 과업은 사랑이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누구나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늘 사랑을 꿈꿨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삶을 꿈꿨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씩씩하고 또박또박 자신의 글을 읽었다. 하지만 조마조마했다. 이런, 또 이혼 얘기로 마무리되는 건가. 가슴이 졸이면서도 그녀의 글은 솔직하고 담백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녀는 모두가 돌아가며 발표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글쓰기 첫 수업에서 글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죽고 싶다. 요즘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 그렇다, 죽고 싶다 이다'
그녀의 탄식과 같은 첫 문장이 체 끝나기 전에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죽고 싶다 라는 문장이 주는 섬뜩한 느낌과 대조적으로 그녀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알쏭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