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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Oct 19. 2021

소설<알쏭당>

산책


사람들이 주로 산책하는 코스는 메타세쿼이아 길이었다. 밤이 되면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워지는 공원에서도 유일하게 전등이 중간중간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강과 밀접한 자전거길은 가끔씩 지나가는 라이더들이 선곡한 음악이 울려 퍼져 덜 어두웠다. 하남시 면적의 총 세로 길이만큼의 너비를 차지하고 있는 공원은 또 하나의 야생 지대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공원이라고 지칭하지만 강과 메타세쿼이아 길 사이에는 거대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숲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사람  서너 명이 지나다닐만한, 좁은 흙길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은 산책길이었다. 특히 인적이 드문 밤에 숲 한가운데를 진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날,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매일 걷던 메타세쿼이아 길의 생명력이 이제는 지루해진 걸까.

숲의 입구에 서자 그동안 맡지 못했던 냄새가 먼저 반겼다. 코 끝에선 망설여지는 향이지만 맡을수록 기분 좋은 냄새였다. 숲 냄새였다. 신발 밑창에서는 시멘트 길에선 느끼지 못했던 불규칙함이 느껴졌다. 작은 자갈들과 흙은 의외로 푹신해서 오래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숲에 들어서는 순간 약간의 두려움에 멈칫했다. 완전한 암흑이었고  달빛이 유일한 전등이었다. 만약 시골길을 걷는 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차갑게 몸을 감싸는 가을 공기는 숲 특유의 시원함과 더해져 약간 오싹함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암흑 속 숲을 걷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너무도 고요해서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검은색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와 수풀 사이를 걷는 시간은 고독하다기보다 꼭 누군가 함께 걷는 기분이었다. 좁은 산책길에도 샛길은 있었다. 작은 언덕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샛길은 컴컴한 공원에서도 유독 빛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이미 깜깜한 정적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주저 없이 샛길을 따라 언덕배기를 올라갔다. 서너 번 정도의 체중이 무릎에 실리는 느낌이 들 때쯤 언덕배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하게 짧은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예봉산과 검단산 아래 광활하게 펼쳐진 검고 푸른 숲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항상 보았던 숲의 옆모습이 아니라 정면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이제야 숲의 생김새를 알 것 같았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무엇보다 자세히 보였다. 이곳까지 걸어온 길이 훤하게 보일 뿐 아니라 그동안 걸었던 산책길이 눈에 들어왔다. 숲의 중앙은 바람에 누운 갈대와 수풀이 무성했고 지난여름 수마에 휩쓸려 쓰러진 나무와 버텨낸 나무로 울창했다. 공원의 대부분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도심에는 어울리지 않는, 야생 그 자체였다.



"철퍼덕"

갑자기 발 밑에서 어떤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떨어졌나. 딱딱한 물건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는 아니었다. 순간 당황했다. 새가 날갯짓을 하는 소리 일 수도 있었다. 설마.. 새가 날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건가, 날개를 다쳤나, 조마조마하게 시선을 아래로 이동했다. 적갈색의 강아지? 새끼 강아지인가, 적갈색의 아주 작은 동물인데.. 누가 버리고 갔구나, 

아... 고라니구나..

이제 갓 태어난 것 같은 새끼 고라니였다! 이제 막 핏덩어리를 벗어난, 적갈색의 손바닥만 한 고라니가 내 발밑을 일어나고 넘어지고를 처절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었다. 아마도 철퍼덕 소리는 새끼가 넘어지는 소리였던 것 같았다. 두 다리로 일어서는 게 첨인 듯 힘겹게 버텨보는 고라니 새끼는 다리를 오자 모양으로 만들고 나아가고 있었다.

"엄마가 있다는 건데..."

생각이 체 끝나기 전에 새끼 고라니는 수풀 속으로 아장아장 기어 들어갔다. 언덕배기의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 살폈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싸늘한 낌새가 느껴졌다. 조막만 한 새끼를 두고 어미가 모른 체 떠날리가 없었다. 비스듬한 언덕에 내리막길에 동그란 반원처럼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올라왔다. 놀란 눈을 한 고라니가 기다란 목을 빼고 동그랗고 큰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검고 큰 눈동자는 당황한 눈치였고 시커먼 코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 살짝 킁킁거렸다. 적갈색의 털은 약간 뻣뻣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거칠어 보이진 않았다. 뒷다리를 살짝 오므리는 걸 보니 언제든 도망칠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의도치 않게 고라니 모자의 산책을 방해한 걸까. 나와 고라니는 언덕배기의 끝과 끝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긴장감이 느껴질 만 한데 그러질 않았다. 긴 목을 쭉 내밀고 사라진 새끼를 바라보는 모습은 처량하고 슬퍼 보였지만 큰 귀에 비해 작은 얼굴은 귀여워 보였다.

'너를 해칠 생각이 없어, 그냥 지나가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스윽'

자갈이 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표정에선  아직 경계심을 지우진 않았지만 숨을 고르고 앞발을 구부리며 천천히 발을 떼기 시작했다. 고라니 한 마리가 내 눈앞에서, 두 발짝을 크게 옮겼을 때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뻣뻣하고 차가워 보이는 털 아래로 근육이 서서히 움직였고 등부터 다리를 감싸는 털은 적색에 가까웠지만 배 안쪽은 흰색 털이 감싸고 있어서 따뜻해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눈 깜짝할 사이에 , 순식간에 뒷발을 튕기며 날아오르듯 뛰어오르는 모습이 내 눈앞에서 벌어졌다. 순간 앞 이빨을 입 사이로 내밀고 있는 어미 노루의 검은 눈동자와 눈이 스치듯 지나갔다. 얼굴에 비해 유난히 큰 눈과 생각보다 길고 흰 이빨이었다. 경쾌하게, 마치 우아한 발레리나가 뛰어올라 고고하게 공중에 잠시 머문 다음 내려오듯,  갈대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가다 다시는 갈대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공원 한복판을 순식간에 가를 수 있는 만큼의 엄청난 속도였다. 어미가 새끼를 만났는지 궁금해 한참을 수풀 뒤로 펼쳐진 갈대숲의 반향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바람에 갈대밭 억새풀이 흔들리면 고라니가 아닌지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고고하고 생명력 있는 움직임을. 그리고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이유 모를 벅참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고라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 빨려 들어갈 것 같던 가슴 뛰던 그 순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쉬움이 남았는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한참을 그들이 사라진 수풀 속을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였을까. 공원에 도착하면 언제든지 큰 귀를 쫑긋 세우고 수풀 속에서 숨어 있을 고라니를 찾아 나섰다. 태연하게 걷고 있으면 어디엔가 숨어 있을 고라니가 나타나길 바랬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다.

예봉산 위로 달빛이 떠오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산책을 나섰다. 그리고 숲 속으로 들어서면 어김없이 녀석들을 만났다. 처음엔 녀석들도 낯설었는지 장대 같은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눈만 빼꼼히 내밀고 사람을 염탐했다. 내가 자세를 낮추고 녀석과 눈을 오랫동안 마주치자 갑자기 숲 안에서 "아앜~!!"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고라니의 우는 소리를 들으니 신기했다. 그 소리는 친구 규호가 불안감을 느낄 때 지르는 비명과도 비슷했고 아니 좀 더 날카롭고 공격적이었다.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걸 소리를 통해서 느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어두운 수풀 사이로 고라니의 검은 눈동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아뿔싸, 고라니 무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있는 곳이었다.

나는 공포심에 질려 조용히 가던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설마 쫓아오는 건 아니겠지. 공격성이 없는 놈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떨며 뒤를 여러 번 돌아보며 걸어갔다.  그리고 산책이 끝날 때까지 사람의 비명 같은 섬뜩함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와 녀석들은 같은 종(種)류가 아닌 다른 개체라는 걸, 다른 씨앗으로부터 탄생된 생물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너무도 어두워서 오직 볼 수 있는 건  내 안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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