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목 Nov 11. 2021

소설<알쏭당>

알송당

최근 들어 규호는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말을 자주 했다. 항암치료가 끝난 후 집에서 쉬고 있던 내게 병문안이라는 명분으로 찾아왔지만 실은 근처 애견카페를 함께 가고 싶은 게 속내였다.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는 혼자 가라고 했지만 규호는 끝까지 징얼거렸다. 성인 남자의 대다수는 나이를 먹어도 어릴 적 성격 그대로 간직하고 사는 피터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필요에 따라 가면을 써서 상황에 맞게 살아가지만 원래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어쩌면 어릴 적 친구는 그런 가면을 벗어던지고 만나는 유일한 관계일 거다. 결혼은 성숙한 성인이 만나서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은 책임이라는 더 큰 바탕을 둔 일종의 계약관계라고 생각했지만 규호의  변하지 않는 징얼거림을 볼 때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너 기억 안 나? 중학교 때인가 너희 집에서 키우던 요크 셔테리아 말이야, 내가 놀러 가면 너 맨날 걔가 너 귀찮게 한다고 발로 차고 그랬잖아"

규호의 아버지가 젊은 새엄마를 집에 들이기 전까지 규호의 집은 학교가 끝나면 또래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규호의 집은 코흘리개 남자애들이 들어가면 눈치챌 정도로 동네에서 제일 크고 비싼 집이었다. 학교에 등교하는 아침이면 규호의 집 앞에는 검은 세단을 걸레로 열심히 닦고 있는 운전사 아저씨가 항상 기다리고 있었다. 각지고 번쩍번쩍한 검정 세단을 타고 나가시면 집에는 가정일을 도맡아 하는 도우미 아줌마밖에 없었으니 또래 애들에게는 규호의 집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어느 날 규호의  아버지가 작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해 왔다. 아마도 외동아들인 규호가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규호는 아버지가 갖고 온 개라며 정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새엄마가 집에 들어오면서  개에 대한 히스테리는 더 심해졌다. 오히려 그런 요크셔테리아를 산책시키고 애정을 쏟은 건 도우미 아줌마였다.

"그러니깐, 내가 그땐 왜 그랬을까, 요즘은 강아지만 보면 너무 사랑스러워~"

멋쩍게 웃다가 이내 강아지를 상상했는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의 환한 웃음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옛 기억을 끄집어내자 규호는 당황했는지 자기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변했다고 했다.

규호는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서울 외곽의 신도시에서 살고 있었는데 기존에 있던 마을을 철거하면서 주인들이 버리고 간 유기견들이 동네 근처 야산에 돌아다닌다고 했다. 그중에 성견인 백구 한 마리가 배가 고픈지 아파트 입구에 나타나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걸 목격한 규호는 틈만 나면 내려가 백구의 밥을 챙겨주고 알뜰히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주민중 한 사람이 백구를 보고 위험하다고 느꼈는지 유기견 신고를 하게 되고 관할센터에서 나와 올무로 포획을 해서 데려갔다고 한다.

"백구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것도 올무로 뒤집어 씌워서 잡아가냐고?! "

어린 자녀들과 함께 사는 가족이 많은 신도시 아파트에 덩치가 꽤 있는 개가 어슬렁 거린다면 나라도 신고를 했을 것 같은데 규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화를 내며 관할 구청에 전활 걸어 동물도 인권이 있다며 따지기도 하고 동네 커뮤니티에 이러 저런 글을 올렸다고 했다. 다행히 규호 같은 동네 주민들이 꽤 있었는지 백구는 안락사를 면하고 지방에 있는 보호센터로 이동하게 되었다.

"백구가 올무에 잡힐 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꼼짝도 안 한다고 하더라고, 동네 커뮤니티 카페에서 백구랑 친했던 주민들이 같이 가주면 이동하는데 수월할 거라고 하더라고,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아"

나도 그동안 정을 줬으니 마지막까지 같이 가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규호에게 말했다. 규호는 회사의 월차를 내고 동네 사람들 몇몇과 차를 타고 백구와 함께 보호센터로 이동했다고 한다. 규호 말에 따르면 자신이 나타나자 동네 주민들이 일동 당황했다고 한다.

"아.. 그분이.."

 규호의 백구사랑은 동네 커뮤니티에서 유명했는데 그가 나타나자 동네 주민들은 친구의 정체가 남자일 거라고는 상상을 못 했는지, 그것도 마흔을 앞에 둔 동네 아저씨가 나타날 줄은, 지방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규호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내내 조용히 있었다고 했다. 차 안에는 몇몇의 동네 주부들과 젊은 여성 한 명 그리고 유일한 남성 규호였다. 마치 아내에게 등 떠밀려 동네 반상회에 참석한 기분이었다나 뭐래나. 아무튼 그 이후에도 규호는 유기견 보호센터에 가서 봉사를 하면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고,칭얼되는 대신 당근으로 ,꼬드겼고 애견카페에도 가자고도 했지만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펜션의 시바견은 거의 모든 시골 개들이 그러하듯 꾀죄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같으면 무심하게 지나쳐서 숙소로 짐을 옮겼을 텐데 무슨 영문이지 차에서 내리자마자 녀석에게 다가가 털을 쓰다듬었다. 영실의 고양이가 좋아하던 이마에서 정수리 부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다 이내 몸통으로 옮겨 손바닥으로 크게 한번 머리에서부터 엉덩이까지 털이 빠져라 쓰다듬었다. 어라, 이 놈이 기분이 좋은지 눈을 지그시 감고 힘을 더 빼서 드러눕더니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두 팔을 오므리고 다리를 쭉 뻗은 테 배를 드러냈다. 그런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녀석의 배 위아래를 만졌다. 몸통의 털은 갈색 빛깔로 뻣뻣했지만 뱃가죽은 희고 물렁물렁했다.

녀석이 혓바닥을 낼름낼름거리고 숨을 헐떡 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이번 여행에서 생각지도 못한 친구 하나가 생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침 녀석은 나와 같은 수컷이었다. 오랫동안 쭈그려 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쥐가 올라왔다. 아차, 짐을 내리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지. 좀 더 자신을 쓰다듬어 달라는 개의 눈빛을 무시하고 일어나 차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려 하자 손바닥이 시커먼 숯을 바른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었다. 짐을 꺼내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할 정도였다. 주차장에서 ㄷ자 모양의 펜션 한가운데 마당으로 들어가니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푸른 산이 눈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스님이 말한 오름이었다.

"통나무집에서 정면으로 오름이 보이는데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계약했죠"

스님의 말 그대로 저 멀리 오름이 신기할 정도로 펜션의 ㄷ자 안에 들어와 안착하고 있었다. 개 한 마리가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정도의 적당한 마당과 그 앞에는 펜션 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다양한 꽃들과 각종 작물이 정성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제주의 동쪽 하늘 아래 ,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 아름드리나무같이 굳건히 서있는 오름을 매일 아침 볼 생각에 가슴이 살짝 벅차올랐다. 한 달 동안 지낼 통나무 펜션을 바라보았다. 굵은 통나무로 틈새라고는 찾기 힘들 정도로 빈틈없이 만들었다는 인상이 들었다.

"누구세요?"

주변 풍경에 취해 이곳 저것 둘러보던 내 등 뒤로 펜션 가운데 발코니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흰머리와 흰 속옷 상의를 입은 남자는 제주 날씨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듯 더위에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아, 스님에게 연락을 못 받으셨나요?"

펜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스님에게 미리 언질을 받지 않은 건지 오늘따라 유독 더운 제주 날씨에 짜증 난 건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니 뭐 여기가 펜션도 아니고 나참!"

아니, 왜 짜증을 내지, 그리고 입구에 걸려있는 '통나무 펜션'은 폼으로 걸어 놓은 건가, 하고 싶은 말을 많았지만 제주에 막 도착한 기쁨에 금세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스님 집이 어딘가요?"

"저기~ 아마 열려있을 거예요, 흠"

남자는 귀찮은 듯 손짓으로 양쪽의 통나무 펜션 중에 한쪽을 알려주고 나서는 발코니의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밖은 강렬한 태양으로 무더웠지만 숙소 안은 거짓말처럼 시원했다. 그리고 거실 창문에서도 저 멀리 오름이 액자 속의 그림처럼 사뿐히 얹어 있었다. 짐을 다 옮기고 한숨을 돌리며 소파에 앉아 창문 넘어 오름을 바라보았다. 청록색의 숲이 촘촘하게 둥근 오름의 능선을 채우고 있었고 가운데는 연한 녹색의 잔디가 펼쳐 저 있어서 그림처럼 구분되어 있었다. 식사를 할 때도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볼 때도 창으로 오름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숙소 문을 열고 나가면 아까 만났던 시바견이 나무 테라스에 누워있다, 스윽 고갤 들어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봤다.

숙소로 오는 길에 마트에 가서 한 달 동안 먹을 식재료를 한껏 담았다. 이번 여행은 숙소에서 웬만하면 직접 해먹을 계획이다. 끼니때마다 밖에 나가서 사 먹기엔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짧지 않아서 식비를 아껴야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였다. 코로나로 인해 제주의 관광객이 예전 같지 않다고들 하지만 식당이나 관광지를 가면 인파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을 볼 때 제일 처음 담은 건 흑돼지였다. 작년 제주여행에서 입맛에 가장 잘 맞았던 제주 음식은 제주 흑돼지였다. 제주 흑돼지는 다른 지역의 흑돼지와는 맛이 확연히 달랐다. 육질이 탱탱하고 쫀득쫀득했으며 특히 비계 부분을 씹다 보면 단순한 기름덩어리가 아니라 어느 순간 비계를 먹기 위해 제주 흑돼지를 먹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제주에서의 첫 저녁식사는 흑돼지고기가 들어간 카레였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우니 어느덧 푸른 오름의 능선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잠에 들기 전에 문을 열고 나가서 녀석의 털을 한번 더 쓰다듬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이 체 몸으로 일으켜지기 전에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알쏭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