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목 Nov 07. 2021

소설<알쏭당>

알송당


백사장으로 걸어 나와 몸에 남아있는 바닷물을 비치타월로 닦아냈다. 이제는 익숙해진 긴 머리칼이 물에 젖어 어깨에 들러붙어 있었다. 물기를 체 마르기 전 그대로 비치타월에 누워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태양이 내뿜는 여름의 열기는 강렬했다. 온몸을 달구는 햇살은 내 몸 한가운델 가르는 수술 봉제선을 내리쬐며 이제는 괜찮다고 말하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배를 쳐다봤다. 이제는 제법 수술의 흉터가 많이 아물었구나, 양옆에 고정하듯 찍힌 스테이플러 자국이 예전보다 흐릿해짐을 알 수 있었다. 작년, 삼양해수욕장의 검은 모래에 배를 갖다 대고 한동안 찜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면 수술과 항암으로 지친 육신이 치유될 거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던 거였겠지. 서울과 가장 먼 탐라도 제주의 어느 해변가에서 불과 두 시간도 체 걸리지 않는 시간에 거짓말처럼 백사장 한가운데 누워 있다고 생각하니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공항에서 수화물을 접수하는 항공사를 헷갈려서 어리바리한 사실은 이미 잊힌 지 오래고 작년 제주여행의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오래전 영실이 스쳐지나 가면 말했던 이곳의 기억이 선명한 이유는 무얼까. 병원 배드에 누워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을 때마다 영실과의 추억은 마치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수액주사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영실은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집에서 독립하겠노라 몇 군데 집을 알아봐 놓았다고 부동산에 같이 가자고 했다. 노쇠한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던 영실이 갑자기 집을 나온다고 했을 때 좀처럼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직장도 가까웠고 평소에 팔순이 넘은 할머니 걱정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영실은 나와의 관계가 깊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힘겹게 가정사를 털어놨다. 다른 누군가가 영실의 얘길 들으면 참 기가 막히고 안타까운 이야기라고  아픔에 공감해주거나 같이 슬퍼해줬을 텐데 난 그때 그러질 못했다. 아마도 난 애써 영실의 이야기를 외면했던 것 같다. 영실의 손목에 그어진 몇 줄의 흉터도 애써 못 본 척했으니깐. 영실이 힘겹게 혹은 담담하게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아네, 또 그놈의 가정사군요, 힘들었겠네.. 근데 난 더 이상 그런 얘길 들어줄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어 그게 삶인데 뭐... 난 너랑 즐겁게 연애를 하고 싶다고..'

규호 그놈 하나로 아픈 가정사는 친구로서 할 수 있는 감당을 했다고 생각했다. 지겹도록 그 아픈 가정사로 인해 생긴 것 같은 병적인 히스테리와 화를 견뎌내고 남은 건 한동안 만나지도 연락하지도 않는 단절이었다.

그런 규호에게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규호에겐 난 늘 충고하는 조언자였고 잘못을 지적하는 비판자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영실의 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모른 체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난 딱 그만큼의 관계를 원했지만 상대들은 항상 너무 많은 걸 나에게 원하고 기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실은 나와 달랐다. 내 직장과 가까운 강남 부근의 작은 원룸들 몇 개를 둘러보고는 진짜로 독립할 생각이냐는 나의 물음에 영실은 말했다.

"내가 회사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으니 전세로 구하자, 오빠가 힘들어하니깐.."

아차 싶었다.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지만 나도 영실에게 가정사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 집의 가정사는 '돈'으로 귀결되는 부동산 문제였다. 지긋지긋한 월세 살이를 십 년 넘게 해오고 있던 우리 가족은 일명 하우스푸어였고 잘못된 부동산 투자로 대출금만 한 달에 이백 가까이 내고 있었다. 집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고 있던 나는 월급을 받아 월세와 대출금을 내면 통장에 돈이 남아나질 않았다. 내가 투덜대며 했던 말들을 영실은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전세비를 자신이 책임질 테니 집에서 나오란 말이었다.


비치타월과 함께 갖고 온 '자본론'을 꺼내 들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융성 한 도시, 서울에서 벗어나 제주도의 한적한 해변가에서 마르크스 얼굴을 보니 새삼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녀가 나에게 자본론을 빌려준 이유가 궁금해졌다.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자본론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걸까 아니면 현재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말을 했던 걸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백사장에 누워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서문을 펼쳤더니 순간 어느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학문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하지 않고 학문의 가파른 오솔길을 기어 올라가는 사람만이 학문의 빛나는 절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르크스 형님이 서문을 읽고 대충 책을 덮으려는 얄팍한 생각을 감지했는지 , 첫 몇 장은 읽기가 매우 힘듭니다, 라는 겁을 주는 동시에 미리 선전 포고하듯 말한다. 이번 여행에서 자본론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너무 오랫동안 햇볕 아래 있었는지 온몸이 서서히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 달 동안 제주에서 묵을 숙소로 이동해야 했다. 스님이 사진으로 대충 보여줬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위치에 있는지 , 숙소에서 바로 보인다는 오름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작년에 제주에 왔을 때에도 송당리는 가본 적이 없는 장소였다. 내비에 주소를 찍으니 숙소는 비자림과 제주에 오면 항상 들리는 ㅍ다방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발 200-600미터를 가로지르는 중산간 도로는 운전할 맛이 나게 구불구불했고 창문을 열면 제주 특유의 숲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로 삼나무가 울창하게 뻗어 있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서 손가락 끝으로 바람의 흐름을 느끼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 나무들이 내뿜는 향을 마셨다. 한 달 동안 묵을 숙소, 내 집을 찾아간다고 생각하니 이제야 제주에 안착한 기분이 들었다. 비자림로의 좁은 이차선 도로를 타고 올라가니 오른 편으로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ㄷ자 모양으로 , 성인 남자가 팔을 벌려 감싸도 남을 정도의, 굵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세 채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운데 집은 펜션 주인이 사는 곳인 듯 일반 가정집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마주 보고 있는 양쪽의 집은 손님을 받는 펜션 인양 문이 굳건히 닫혀 있었다. 펜션의 입구에는 차를 델 수 있는 주차공간이 있었고 렌트한 소형차를 가뿐히 주차하기 충분한 공간이었다.

펜션에서 제일 처음 나를 반겨준 이는 다름 아닌 강아지, 시바견이었다. 차가 주차를 하는 동안 시바견 한 마리는 고개를 주차장 시멘트 바닥에 힘없이 축 늘어진 채로 수그리고 있었다.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려도 바닥에서 일어나 경계자세를 취하거나 꼬리를 흔들어 반기지도 않고 계속 턱을 바닥에 붙이고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라, 시골에서 개를 밖에서 키운다는 건 낯선 이들의 방문에 짖어서 주인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경계를 하기 위해서 일 텐데 녀석은 주인의 뜻과 다르게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고개를 축 늘어 뜨리고 힘겹게 눈을 떠서 방문자를 인식할 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알쏭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