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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Nov 16. 2021

일상, 세상

축하드립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축하드립니다"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발신자가 표시가 되어 있었다면 축하의 의미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을 텐데  난데없이 축하한다니.

아주 잠깐이었다. 완벽한 타인에게 축하받을 일을 상상하며 나에게 물었다. '이번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에 지원했었나? 너 안 했잖아..'

'회사에서 내가 저장하지 않은 동료에게 온 것일까? 화사에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긴 건가? 아.. 친구가 이제는 모르는 번호로 장난을 친 건가...'

로또~!! 저번 주에 산 로또.. 에이 설마 정신 차리자...

축하드립니다.. 아, 얼마나 듣고 싶은 말이고 들은 지 오래된 말이던가..

정체도 알 수 없는 문자에 이리도 설레는 걸 보니 난 축하가 그리웠나 보다.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문자함으로 들어갔다.


"축하드립니다.

데일리 증권방, 당신을 위해 급등주를 추천해드립니다.

퀴즈를 풀면 무료 리딩 방에 초대해드립니다."


욕이 나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안 그래도 파란 불이 켜져 있는 증권계좌를 매일 확인하는 일이 곤욕스러웠는데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이 문자가 주식계좌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 일거다.

퀴즈가 좀 어려웠으면 그나마 풀려는 시도를 하며 광고 문자를 보낸 사람이 궁금했을 텐데.. 퀴즈는..

"우리나라의 국민 주식은? 00 전자. 0을 채워주세요"

또 욕이 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생일날이면 어김없이 문자로 나를 축하해주는 여러 회사들이 있다.

00 은행, 00 증권, 00 미용실... 그나마 단골 미용실을 바꾸면서 미용실 문자는 들어오지 않는다. 생일날 이런 문자를 친구나 지인들보다 먼저 받으면 처음엔 기분이 별로였는데 이제는 텅 빈 생일날 그나마 나를 챙겨주는 기업들이 고맙다.

입장을 바꿔 나도 카톡에 고객 생일이 뜨면 문자와 함께 커피 쿠폰을 보내는 걸 보면 누구나 이런 문자를 받고 누구나 이런 문자를 보내는 그런 세상이다.

갑과 을이라는 흑백논리로 세상을 재단하는 것이 편하지만 따지고 보면 누구나 어디에선 갑도 되고 어디에선 을이 되고 계속 을인 것 같지만 한순간에 갑이 되는 순간도 있고 복잡하게 혼재되어 있다.

카톡 친구에게 뜨는 내 생일을 어느 때부터 안 뜨는 기능으로 바꾸었다. 원래 누군가에게 축하를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있고 정말로 친한 사이라면 굳이 카톡에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축하를 해줄 테니깐. 그러니깐 진심 어린 축하만 받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나마 카톡이나 인스타 등을 안 하면 축하를 못 받을 애매한 인연들도 있다. 아니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년째 보진 못했지만 sns를 통해 연락만 하는 인맥이 대다수고 자주 보는 소수의 찐 친구들 그리고 연락조차 안 하고 연락처를 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타인 같은 지인들.

언제부터인가 스마튼 폰의 전화 기능과 문자는 업무 이외의 일로는 한산해졌다. 사회생활이란 걸 하다 보면 새로운 인연도 생기지만 원래의 인연들도 사라져 간다.

죽마고우라고, 어릴 적 친구들은 평생 간다는데 그것도 옛말이다. 20년 넘은 학창 시절 친구도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생기는 것도 인생을 살다 보면 새로운 묘미를 가져다 주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친구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여진이 꽤 오래간다. 지나온 세월이 부정당하고 헛 산 기분도 든다. 무엇보다 완벽히 편한 관계는 없다는 생각에 세상이 이전보다 어두워 보인다. 그래서 나일 먹어 가는 것은  좋은 점 보다 나쁜 점이 더 많다.


몇 번의 인간관계의 부침을 겪고 나면 관계에 대한 회의감과 인간에 대한 혐오가 생긴다. 그래서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휴머니즘이 있어요 라는 말이 참 덧없다. 인간은 인간을 혐오하거나 인간애로 감싸는 휴머니즘 그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함께하는 순간에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거나 나쁜 인간으로 기억되겠지. 완벽히 편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듯 완벽히 착한 사람, 완벽히 나쁜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깐.

그래서 사람이 제일 무섭다. 나도 무섭다. 여러 가면을 때에 따라 교대하는 현대인은 한 가지 가면을 갖고 살아가는 유일한 순간은 혼자 있을 때이다. 그래서 혼자가 편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랑 대화한다. 이렇게.

"무슨 축하할 일이 있는 거지, 갑자기 심장이 뛴다"

나일 먹을수록 취향이 확고해지고 자아는 단단하게 자리 잡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시간적 여유도 많지 않은 상황이라면 취향과 가치관이 맞지 않은 상대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엄청난 곤욕이다. 일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더 이상 유지할 필요를 못 느낀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퇴직을 하고 이직 준비 중이라 한가하다고 얼굴을 보자고. 이 친구가 연락이 올 때마다 신기하다.

학창 시절, 여러 무리 중 이 친구랑 이렇게 연락을 하고 만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깐.

그 친구와 나는 취향도 종교도 다르고 노는 방법도 다르고 심지어 지지하는 정치세력도 달랐으니깐. 그 친구는 내 친구와 놀고 그 친구의 친구는 나랑 놀았지만 우리 둘은 따로 어울린 적이 없다. 그런데 세월이란 게 시간이란 게 참 신기하다.

원래 친했던 친구들은 너무 친한 나머지 몇 번의 싸움 끝에 소원해지고 연락도 뜸해졌지만, 이 친구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우리 둘은 가끔이지만 무리 중에 편하게 만나는 친구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만나면 다른 친구들처럼 막 편하게 대하는 친구는 아니다. 그런데 가끔 만나면 대화도 잘 흘러가고 적절히 들어주고 얘기하고 합이 그런대로 괜찮다.

굳이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보니 쉽게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다는 점. 그 정도인데,

참 슬픈 얘기지만 차분해 진건 우리가 나일 먹어서 일 거다. 그러니깐 우리는 한창 혈기왕성하고 남의 의견보다 자신의 의견이 무조건 옳다는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내지 않아 서로에게 앙금이 없어서 이렇게 편하게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정이 쌓이고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다는 것도 다 옛말이고 나에게는 요원한 말인 것 같다.

상대의 민낯을 마주하고 나면 정이 확 떨어져서 더 이상은 예전 관계로 돌아가기 힘들었나 보다. 가면을 벗고 민낯을 보여줬으면 그 사람에게 더 애정이 가고 따뜻하게 보듬어줘야 하는데 난 왜 그러질 못했을까.

어느 심리학자가 말하길, 100년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더 좋은 인간관계는 소수의 깊은 관계도 좋지만 언제든 편하게 만나서 수다를 떨 수 있는 적당한 다수가 낫다고 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깊은 인간관계가 한순간에 깨지게 되면 여파가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쳐 정신건강학적으로 안 좋다는 말이다.

그리고 심리학자의 말속에는 깊은 관계는 상대에게 더 많은 걸 기대하므로 갈등이 생길 요인이 더 많다는 얘기로 난 해석 했다.

너무 깊지 않고 언제든 편하게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할 수 있는 관계가 여럿이라면 인간관계에 너무 목매지도 않을 테니깐.

하지만 이조차도 타고난 성향 때문에 힘든 사람도 있을 거다.

난 깊고 내밀한 관계를 더 선호하는 내향적인 사람일까, 아니면 다양한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는 걸 원하는 외향적인 사람일까,

아마도 그 중간 어딘가에 내가 있을 거다. 그래서 관계는 누구에게나 힘든가 보다.


"축하드립니다" 문자를 지우고도 화가 풀리지 않아 차단 버튼을 눌렀다.

점점 차단하는 메시지가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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