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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Nov 15. 2021

소설<알쏭당>

알송당


제주도를 좋아하는 이유를 무어냐고 그녀가 물었을 때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 없었다. 작년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렌터카를 인수하자마자 찾아간 곳은 노루생태공원이었다. 노루와 고라니는 같은 사슴과 여서 언뜻 보면 구분이 힘들지만 엄연히 다른 종이었다. 산책길에 숨어 있는 고라니를 쫓듯 찾아다닌 나로선 노루에게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는 공원이 제주에 있다는 사실이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임에서 고라니 박사로 불리게 된 노루와 고라니의 차이도 노루생태공원의 푯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뿐만 아니라 흔한 자연에서도 조금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신기하게도 노루를 만났다. 사려니 숲길을 걷다 물찬오름으로 갈라지는 길에서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산책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삼나무로 둘러싸인 숲에 몸을 숨길 수 있었기에 실례를 범할 수 있었다. 급한 불을 껐다는 안도감에 지퍼를 올리는데 누군가 쳐다보고 있다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실례의 흔적이 삼나무를 타고 내려간 곳에 , 그래 영길이 만한 반려견 크기의 새끼 노루 한 마리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뭐 별거 없구먼' 하는 표정으로 휑하니 고갤 돌리더니, 앙증맞은 노루 궁둥이를 보이며, 천천히 걸어 사라졌다. 제주에 도착해 야생의 노루를 본 첫 순간이었다. 너무 신기하고 벅찬 나머지 뛰쳐나가 숲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 저, 제가 지금 소변을 보는 데 바로 앞에서 새끼 노루가.. 절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몇몇은 신경 쓰지 않고 가던 길을 걸었고 몇몇은 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피식 웃었고 그래도 다행히 몇몇은 다정히 웃으며 노루 얘길 들어줬다. 다행히도 이곳은 누구나 들어오면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는 숲이었으니 망정이었지 하하. 어디선가 노루가 나타날 거라는 기대를 품은 제주 여행은 어릴 적 누군가 몰래 숨겨놓은 물건을 찾는 보물찾기 놀이와 같았다. 이번 여행은 어느 장소에서 또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 노루를 마주하게 될까. 그리고 그 여정에는 재즈가 있어 심심하지 않겠지. 그래, 제주에서 듣는 재즈는 항상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제주도는 재즈와 묘하게 어울리는 장소였다. 존 콜트레인의 "My Favorite Things"은 작년 제주여행 내내 듣던 플레리 리스트였고 그의 테너 색소폰 소리는 치료기간 내내 유일하게 의지했던 친구 같은 존재였다. 현란하고 묵직하면서 여러 연주자와 합주 중에 솔로 타임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적으로 치고 나가는 색소폰 소리가 활화산 지대로 이루어진 이 섬과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작년 여행의 말미, 제주도 서남쪽 모슬포항에서 우연히 발견한 재즈바는 노루만큼이나 보물을 찾은 기분이었다. 마일즈 데이비스, 빌 에반스, 쳇 베이커..라는 레스토랑이나 재즈바는 익히 봐왔으나 존 콜트레인의 이름을 딴 재즈바는 처음이었다. 당연히 사장은 존 콜트레인을 제일 좋아하는 재즈 마니아였고 아프고 나서 그의 색소폰 소리에 빠져 있던 내게 거짓말처럼 나타난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이제 막 치료를 끝낸 나를 위한 공연 인양, 사장과 나, 단 둘만 있는 바에서, 사장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 콜트레인의 음반을 돌아가며 스피커로 빵빵하게 들려줬다.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의 취기가 오른 탓인지 아니면 제주 서남쪽 모서리 항구에서 우연히 나만이 좋아하는 공간을 발견한 기쁨 때문인지 홀 중앙에 나가 맥주병을 들고 색소폰 소리에 맞춰 춤을 췄었다. 제주 토박이 사장 말에 의하면 모슬포는 척박하고 살기 어렵다는 뜻으로 '몹쓸포' '못살포'라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했지만 나에겐 여행 기간 중 가장 신났던 기억을 선사해준 공간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Duke Jordan "Flight to Denmark" 앨범을 플레이했다. 작년, 재즈바를 나설 때 사장이 추천해준 재즈 앨범이었다.

"알다시피 1960년대에 들어서 재즈 인기가 많이 사그라들었잖아요, 듀크 조던 역시 음악활동이 뜸해지면서 생활고 때문에 뉴욕에서 택시 운전기사를 할 정도였죠, 그때 갑자기 유럽에서 재즈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거죠, 미국에서는 한물간 재즈 가요, 이 음반은 듀크 조던이 덴마크로 이주를 결심하고 넘어간 다음 낸 앨범이고 상업적으로 매우 성공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한 앨범이죠"

사장은 재즈 뮤지션의 인생을 비유해서 당신은 이제 곧 건강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맞이 할 거라는 희망에 부푼 말을 하는 듯했다. 그날 재즈바를 나와 듀크 조던의 피아노 소리에 의지한 체  애월의 숙소까지 검게 내려앉은 어둠을 차로 헤쳐 나갔다. 내가 비행기를 탄 양 덴마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가 느꼈을 설레는 기대감이 꾹꾹 눌러대는 피아노 건반 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앨범의 1번 곡은 "No Problem"이다. 도입부를 알리는 "쨍"하는 드럼의 심벌 소리는 지난했던 과거와 단절하는 것 같고 바로 이어지는 튕기듯 울리는 베이스는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어지는 물 흐르듯이 눌러 나가는 그의 손가락은 순조롭게 이어질 여행을 예견하듯 부드럽다. 무엇보다 이 노랠 들으니 지난 제주여행의 끝에서 연결되어 다시 시작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운전대를 잡은 어깨가 절로 들썩 거렸다. 해안도로를 지나지 않고 중산간을 통해 성산 일출봉으로 가는 길은 헝클어진 나무와 수풀들이 빼곡하게 늘어진 자연 그대로였다. 아, 잊고 있었구나, 제주는 바다가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바다를 찾아갈 수 있고 푸른 자연이 보고 싶으면 코 닿을 거리에 수많은 오름과 야생림이 있는 곳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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