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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Nov 21. 2021

소설<알쏭당>

냄새

이제는 웬만한 회사 건물은 출입증을 찍고 올라가야 하지만 보험회사 영업점이 있는 건물은 누구나 오고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주 가끔은 강남역 거릴 걷다가 보험회사 간판을 보고 들어와서 계약을 체결하는 사람도 있거니와 각종 물건이나 대출 관련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사무실에 상주하고 있는 영업사원에게 거꾸로 보험가입을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험회사의 사무실 풍경은 다른 사무실과는 사뭇 다르다. 바로 옆자리에서 즉석으로 계약이 이뤄지기도 하고 친구를 고객인양 사무실에 데리고 들어와 회의실에 들어가지만 실은 친구와 딱히 갈 곳이 없어 차 한잔을 하러 오는 경우도 가끔 있다. 지점을 지키고 있는 지점장도 뭐라 그러기도 애매한 것이 보험 영업이라는 것이 사교활동과 계약 활동 그 언저리에 애매하게 놓여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규호가 강남역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면 두려워지기 시작한 건 규호의 입냄새 때문은 아니었다. 규호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기뻤던 건 규호도 아닌 다름 아닌 나였을 것이다. 규호는 당연하게 나에게 사회를 부탁했고 난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승낙했다. 비로소 규호가 결혼을 통해 나와 멀어질 수 있다는 어떤 해방감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결혼식 당일 날, 난생처음 사회를 보던 나는 너무도 떨린 나머지 '신랑 입장'을 외쳐야 했지만 애석하게도 '신부 입장'을 외쳐버렸다. 규호는 살짝 당황한 듯 발걸음을 망설였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신랑 입장!"을 외쳤다. 식장은 순간 웃음바다가 되었고 규호의 발걸음이 주례가 있는 무대 상단에 도착해서야 잦아들었다. 주례사가 끝나고 "하객들에게 인사~"라고 말하자 돌아서는 규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나만이 알 수 있는 규호의 표정이었다. 규호는 몹시 긴장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까 내가 했던 실수는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규호는 신부보다 더 긴장하고 무언가 위축되어 있었다. '자슥아, 어깨에 긴장 좀 풀어, 오늘은 군입대 날이 아니라 결혼식이야'라고 눈빛으로 말했지만 규호가 알아듣기엔 오늘은 누가 뭐래도 신랑이 가장 바쁜, 주인공인 날이었다. 그런 규호를 보며 이제는 그와는 잠시 떨

어지겠구나 라는 안도와 예견할 수밖에 없는 결혼생활의 파국에 대한 걱정이 함께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규호는 내 예상대로 이혼을 하지 않았고 전보다 더 정교하게 아내에게는 철저히 숨긴 체 나를 찾아왔다.

한 번은 "그냥 돌아가라"라는 말에 사무실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언 듯 진중해 보이지만 한번 불안증세가 찾아오면 규호는 예측할 수 없는 난폭함과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런 그를 달래고 어르고 해서 사무실 근처 카페로 데려가면 특유의 영글 영글 한 눈으로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애원하며 말했다.

"너 핸드폰 유심 칩을 나한테 줘야겠어, 누군가 내 카톡을 훔쳐보는 것 같아, 내 신상이 다 털리는 기분이야, 미안한데 정말 미안한테, 이번 한 번만 내 부탁 들어주라.."

규호는 내 핸드폰 유심 칩에 자신과 했던 대화 내용이 다 들어있으니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년 이맘때쯤 규호는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맞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받았고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 같다며 불안증세를 보였다. 규호는 수능시험이나 취업, 결혼, 직장생활 등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길목마다 불안을 느꼈고 그럴 때마다 나를 찾아와 울거나 갑자기 흥분을 하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상증세를 보였다. 처음부터 친구의 불안증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는 나도 그의 불안과 함께 지냈다. 달리 말하면 규호의 불안에 기대어 살았다는 말이 맞겠다. 

당시 나는 남들보다 뒤늦게 닥친 사춘기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뿌리 깊은 허무주의와 무기력 때문인지,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렇다고 노는 데도 딱히 관심도 없는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고 유일한 낙은 학교가 끝나면 규호의 집으로 놀러 가 시간을 때우는 것이었다. 이제 막 남자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는 남고의 교실에서 힘으로 서열을 과시하는 종류도 못되었고 머리가 좋아 등수를 보여주지도 못했고 혹은 친구도 많지 않던 나는 근근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었고 그런 내게 규호는, 규호의 집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무섭기로 소문난 규호의 아버지도 퇴근 후 집에 와서 규호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싫어하진 않았다. 어릴 때만큼 집으로 친구들이 놀러 오지 않는 걸 느꼈던 것 일까, 주말엔 넌지시 자고 가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는 규호의 아버지가 중견기업의 회장인 것도 집에 상주하는 도우미가 항시 있고 집 앞에는 항상 대기하는 개인 운전사가 있는 것이 흔치 않다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규호와 내가 코흘리개 시절부터 알고 지낸 탓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불과 몇백 미터 거리의,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단지 전체가 회색의 시멘트 본연의 질감을 살린 건물로 동등하게 세워진 듯 보이는  아파트는, 실제론 평수는 제각기 달랐지만, 서울에서 나름 시세가 나가는 아파트 단지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동네였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대저택처럼  한참을 찾아 올라가서는 집에 들어가서도 계단을 올라갔다면 아마도 난 규호의 집에 그렇게 자주 들락거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집도 못 사는 집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은행 지점장으로 항상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을 하셨고 스스로 돈을 벌어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와 자신의 꿈인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성실한 자수성가형이었다. 어머니는 소풍이 다가오면 엄마가 없는 규호를 걱정해서 김밥 한 줄을 더 말아주셨고 항상 그런 규호를 딱하게 여겼지만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질 않았다. 성인이 되자마자 규호는 또래 친구들에게는 언감생심인 첫차를 뽑았고 미국으로 여행 가듯 어학연수도 갔다 왔고 20대 중반이 지나자 같은 아파트 단지에 떡하니 홀로 독립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붙어 다니는 우릴 보고 친구들은 징글징글한 부부라고 불렀다. 그래, 우리는 부부였다.

"너도 알잖아~내가 하는 일이 사람 상대하는 일이라, 문자도 못 지우고 유심도 줄 수가 없어.."

이번엔 핸드폰이었다. 20년 동안 한 번도 같은 이유로 불안증세를 보인적이 없는 걸 보면 규호는 참 창의적인 놈이었다. 하지만 매번 지어낸다고 의심하기엔 규호의 표정은 거짓이라고 찾을 수 없을 만큼 항상 진실되게 절규하고 있었다. 

"와이프랑 얘기해봤어? 내가 보기엔 이제는 이런 얘길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규호는 와이프 말만 나오면 손사래를 쳤다. 오랜 연애 기간과 5년 남짓한 결혼 생활 동안에도 규호의 아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했지만 어떤 관계는 유지하는 것이 목표가 돼버려서 가면을 쓰고 연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란 모름지기 목표에 진실한 사람이 열정을 가지면 제일 무서운 법이니깐.

"며칠 동안 회사도 못 나가고 있어.. 밥도 안 넘어가서 그때 내가 너한테 문자로 보낸 여자 사진, 그거 와이프가 알면 큰일 나, 다 지워야 돼.."

좋다고 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카페의 탁자 위에 두 주먹을 포개어 놓으며 핸드폰을 내놓지 않으면 마치 탁자를 박살 낼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규호가 휴대폰에 민감한 건 이번만은 아니었다. 

화장실을 간 사이에 내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풀어 친구들과 내 카톡 대화를 뒤적이다가 자신에게 험담을 하는 친구의 대화를 발견하면 그 친구에게 전활 걸어 쌍욕을 퍼부었다. 여러 번의 그의 불안증세와 더불어 따라오는 욱하는 성질을 받아주지 못하고 친구들이 모두 떠난 뒤였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돈도 많은 놈이 왜 저러고 사냐고 했고 어떤 친구는 차, 집, 결혼까지 모두 아버지가 사준 것이 아니냐며 규호의 인생을 폄하했다. 

하지만 나는 규호를 떠날 수 없었다.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한창 일하던 어느 날, 탁하고 거친 하지만 익숙한 음성이 전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규호의 아버지였다. 어릴 때는 못 느꼈던 위압감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에 나와 남의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면서 학창 시절 쉽게 생각했던 교편이 얼마나 안정적인 직장인지, 아버지가 밤늦게 퇴근하고 들어오는 수고로움, 규호의 아버지처럼 기업의 수장이 갖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네 규호랑 아직 연락하고 지내지?"

규호의 아버지는 나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아들 얘기가 나오자 근엄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목소리가 평범한 아비의 그것처럼 애처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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