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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Nov 24. 2021

소설<알쏭당>

냄새

평생을 사업가로 일생을 살아온 규호 아버지는 규호 말에 의하면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사업을 일구고 번창시킨 완벽한 자주성가형 사업가였다. 뼈대가 굵은 장대한 체구와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감싸고 있는 주름은 영화 "길"과" 그리스인 조르바"에 출연한 앤서니 퀸의 얼굴을 연상시켰고 풍기는 분위기는 그의 출연작 "더 그릭 타이쿤"에서 연기한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흡사했다. 어릴 적, 규호의 집 앞에서 수행기사와 부의 상징인 각진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그의 모습은 어린 나이에도 성공한 남자의 표상으로 보였다. 강남권에서 살짝 떨어진 외곽의 건물 한 채를 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의 회사는 이제는 버젓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여 자리 잡은 지 오래였고 규호도 결혼하기 전에 잠깐 일한 적이 있는 회사였다. 규호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서류상 회사의 직원이었으니 잠깐 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출근을 하고 회사의 건물에서 일을 한 기간은 단 몇 개월에 불과했다. 규호의 아버지는 그냥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만 있어도 된다고 했건만 규호는 그조차도 힘들어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전활 걸어 강남역으로 오픈카를 몰고 찾아왔다. 규호가 항상 나를 힘들게 한 건 아니었다. 외동아들이면서 아쉬울 것 없는 괴팍한 성격 때문에 친구라고는 나밖에 없었던지라 그는 종종 "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규호의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그의 모습은 이제는 영락없는 할아버지였지만 아직도 두터운 기골과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규호는 결혼과 동시에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내고 있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아버지에게 서울의 아파트를 증여받은 규호는 그전에는 국산차를 사주는 조건으로 수능을 억지로 봤고 어학연수를 갔다 오면서 귀여운 소형 외제차를 탈 수 있었고 회사에 출근하는 조건으로 독일회사의 오픈카를 타고 다녔다. 

결혼은 성공한 사업가이자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한 남자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과제인 동시에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가 자손을 남겨 자신이 이룩한 과업을 이어 나갈 거라는 또 다른 번식에 대한 욕망이었는지 모른다. 규호는 원래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는 연애 지상주의자였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를 다닌 것 말고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였지만 유일하게 일치하는 부분은 남녀의 사랑은 영원할 수 없는,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관계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결혼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계약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규호는 생각을 고쳐먹고 아버지의 제안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수많은 협상을 통해 중견기업을 일군 규호의 아버지는 누구도 거절 못하는 돈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친모를 버린 아버지를 떠나 새 삶을 살 거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규호였지만 그런 호언장담은 결국 아버지가 원한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규호 이놈이 아무리 제 아비가 싫어도 그렇지.. "

규호의 아버지는 허탈한 듯 상심 어린 목소리를 흘렸지만 눈빛만은 웬만한 젊은 사람 못지않은 생기와 분노가 교차했다. 끌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는 게 느껴질 정도의 살기도 느껴졌다. 노인네가 곧 있으면 팔순이라며 몇 년만 버티면 상속의 유류분을 챙길 수 있다는 규호의 말은 직접 그를 마주하자마자 섣부른 기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도 알고 있었나? 보험 말이야..."

"네?"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규호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을 거다. 팀장도 그렇고 선배들은 종종 법인회사 세 군데만 뚫으면 보험일은 어떤 직업보다 수월하다고 했다. 대표의 보험은 상속과 절세를 대비한 고액 보험으로 제안할 수 있고 대표와 친하면 직원들에게 접근하기 용이할 뿐 아니라 회사가 상주하는 건물과 법인 소유의 차량까지 흔히 말하는 노다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규호의 아버지에게는 오랫동안 거래한 보험 설계사가 있었고 심지어 규호에게는 때마다 요란한 선물을 보내고 아버지와 규호 사이의 가교 역할까지 하는 집안의 책사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뜬금없이 보험이라니.

"정말 몰라? 그럼 그 녀석이 혼자 알아서 했다는 건가?"

아, 갑자기 최근 규호가 보험 계약의 계약자와 피보험자의 권리를 물어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규호가 말한 아버지와의 마지막 계약이란 것이 이걸 뜻하는 것이었나.

"규호가 성인이 되면서 증여 목적으로 가입한 보험이 있는데 만기금이 10억 정도 되네.. 하도 오랜 전 일이라 사인한 기억도 없을 텐데 이놈이 직접 보험회사에 방문해서 해지하고 돈을 챙겨갔다는 거야"

영문을 모른 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내게 규호의 아버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물론 매달 수백만 원의 보험료는 규호의 아버지가 납입했고 회사에 등재된 규호 직급의 월급을 맞춰 본인이 직접 낸 것처럼 보험 상품을 설계한 것이었다. 규호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계약으로 본인 명의의 보험 계약을 해지하고 아버지와 결별을 선언한 것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결별은 아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규호의 아버지가 죽으면 연락을 끊고 지내든, 원수지간으로 지내든 법적으로 아들에게 재산중 일부가 유류분으로 지급될 것이다.

"어차피 아비가 다 지 생각해서 증여목적으로 만들어서 주려 던 건데.."

아들을 위해서 주려고 했던 재산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허탈해 보였다. 규호는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10억이면 그 시간을 풍요롭게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네 보험회사 다닌다며?"

"네.. 그런데.. 이번 일은..."

규호의 아버지에게 내가 규호와 함께 작당을 꾸미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는지 어떤 말이라도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어차피 인출된 돈은 뭐 됐고.. 흐음.."

그는 갑자기 괴로운 표정으로 목을 끓더니 이내 없던 노인의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나?.. 이제 겨우 결혼시켰더니 아들 하나 있는 놈이... 에휴, 회사에 나와 그냥 분위기만 파악하고 앉아 있으라고 해도 그게 뭐가 힘들다고 말이야.. 자네도 사회생활을 해봐서 알잖아? 돈 버는 게 어디 쉽나? 그래 봬도 이 회사가 연매출 3백억은 꾸준히 나오는 중소기업인데 나도 누군가에게 맡기고 맘 편하게 떠나야 하지 않겠어?"

비록 어린 시절 생모와 이별하고 한참 예민한 시절,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생판 모르는 젊은 새엄마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규호의 심정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겠냐만은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경제적 자립을 하기 위해 일을 하고 퇴근을 하면 그 나이엔 언감생심인 외제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온 규호의 한가로움은 아버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부유함이었다. 그리고 같은 동네 출신이지만 IMF 이후로 점점 기울어져 가는 우리 집 가세와 규호가 혼자 살기엔 너무도 넉넉한 아파트를 비교하며 이제는 그의 삐뚤어진 성장 환경도 더는 감싸줄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그런 생각은 규호가 결혼하고 나서 더 심해졌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누구보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규호였지만 조금만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그는 중소기업 회장의 아들이었고 번듯한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00 생명 아줌마, 규호 통해서 들었을 거야.."

규호의 아버지는 갑자기 회사와 규호의 보험을 관리하는 보험 설계사의 이름을 꺼내며 말을 이어갔다.

"그분이야 나와의 인연이고, 언젠가는 규호가 내 뒤를 이어 회사를 맡게 되면 자네 같은 친구가 옆에 있음 여러모로 힘이 되지 않겠나? 그리고 규호랑 연락이 되는 유일한 친구 아닌가.."

그는 규호와 어릴 적부터 잘 지내줘서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소파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전번에 규호 결혼식에 사회도 봤지? 내가 회사 법인 계약 만기 건들을 좀 찾아보라고 했는데 적금 하나가 담달에 만기라더라고, 뭐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자네가.."

10억이라는 거액의 보험금을 규호가 가로채는 데 중간에서 도와줬느냐고 추궁을 당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과 다르게 보험계약을 선물했다. 월납 100만 원짜리 적금 계약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한 달은 따뜻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자네도 규호도 살면서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살아야지, 내가 힘들게 일군 회사를 피 한 방울 하나 안 섞인 사람에게 주라고 하면 자네 같으면 줄 수 있겠나, 그리고 규호 저놈 무슨 기술이 있나, 그렇다고 자네처럼 사람 상대하는 사회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결국 회사로 돌아와야지...

자네가 좀 도와주게, 규호가 자네 말이라면 잘 듣는다고 하던데.."

그는 넌지시 말했지만 내 귀에는 어떤 임무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규호가 아버지의 회사를 이어받아 경영인이 된다면 나도 나쁠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규호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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