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목 Nov 26. 2021

소설<알쏭당>

냄새


지하 1층 자재창고, 1층 로비, 2층 영업부서, 3층 구매팀 4층 경영지원.... 건물의 맨꼭대기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부서명이 적혀 있는 패널을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이와 비슷한 건물을 오르며 안면도 없는 직원들에게 수줍지만 당당하게 명함을 준 나였지만 오늘은 한 번에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건물의 수장을 만나고 온 것이었다. 결혼 전 규호는 회사에 들어가면서 자기가 잘 얘기할 테니 아버지의 회사에서 함께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의중을 물어봤다. 회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자리 잡는 동안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나름의 세를 형성하고 있어 자신도 회사에서 자기편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때는 규호에게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사회에 나와 홀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규호의 제안을 슬며시 거절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친구의 아버지에게 생각지도 못한 계약을 체결하게 되자 한결 세상이 수월해 보였다. 그래, 그동안 난 왜 규호를 자꾸 벗어나려만 했던 걸까, 규호도 나에게 의지하듯이 나도 규호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규호의 아버지 말대로 규호가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뿐더러 나 또한 규호를 도와주며 살아갈 방도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윈윈 전략이었다.

규호와 나는 어쩌면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했고 어린 시절을 함께한 죽마고우지만 규호의 독일산 오픈카와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하듯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는 폐차 직전의 나의 소나타 LPG 차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친구들이 떠나갔던 이유는 규호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날로 업그레이드되는 그의 차량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번 흥분하면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이 날뛰고 우울의 원인이 매번 바뀌는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성격은 마치 날로 진화하는 독일산 스포츠카와 닮아 있기도 했다. 강남역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강남도로 한복판을 달렸다. 버스전용차선 옆으로 수많은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었다. 강남역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직선형의 널찍한 도로는 뻥 뚫린 전경과 다르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지루한 길이었다. 모두 같은 용도, 같은 재질로 만든 차량들 속에서 유독 외제차가 눈에 많이 띄는 곳도 이 도로 일거다. 아마도 지금까지도 대학로 어느 구석진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더라면 규호와 내가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겠지, 그런 생각은 규호의 아버지 회사를 갔다 오고 나서 더욱 나를 채근했다. 마침 규호에게 전화가 왔다.

"노인네가 계약을 했다며?"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노인네를 한방 먹였다며 통쾌하게 웃던 놈이 회사를 나오자마자 귀신같이 알고 연락이 왔다.

"그런데 어떻게 안거야?"

규호는 자신의 아버지를 노인네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규호의 아버지가 마흔이 훌쩍 지난 나이에 자신을 낳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시절에는 흔치 않은 늦은 결혼으로 또래 아버지보다는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규호와 아버지가 연락을 끊고 지내는 걸 알았기에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규호는 특유의 웃음으로 호탕하게 말했다.

"야, 괜찮아, 노인네가 어떻게든 나랑 엮어보려는 거지 뭐, 상무 누나랑은 가끔 연락해"

규호는 마치 아버지와의 모든 인연을 끊은 것처럼 말했지만 회사의 임직원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까 규호 아버지의 전화 한 통에 회장실로 방문해서 나에게 규호에 대해 이런저런 안부를 물은 장성한 자식이 있을법한 중년의 여성이 상무 누나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규호의 아버지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흉금 없이 말하는 걸 보면 믿고 의지하는 회사 직원임은 분명해 보였다. 나도 보험 계약을 시작으로 여자 임원처럼 규호 패밀리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규호를 걱정 어린 말투로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친엄마처럼 규호를 걱정하는 그녀는 회장실을 나서는 나를 따라 나와 연락처를 알려주며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회장실로 들어갔다.

강남역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예고도 없이 하얀 눈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굵고 탐스러운 눈으로 체 완성되기도 전에 때가 되어 급하게 내리는 빗물 같은 눈은 금세 도로를 적시고 흙탕물로 변질시켰다. 빌딩 숲 사이로 흩날리는 눈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겨울 방학 때마다 펑펑 내리던 함박눈을 그립게 만들었다. 아파트 단지가 하얀 눈으로 뒤덮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에서 나와 아이들이 모인 곳은 다름 아닌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마다 있는 자투리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공을 차기도 하고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었고 밤이 되면 벤치 앉아 수다를 떠는 아지트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사방이 아파트로 둘러싸인 단지의 잉여 공간이었다. 어수룩한 밤이 찾아오면 엄마들이 창문을 열고 아이들의 이름을 고함치듯 부르면 공을 차다가도 친구들을 버리고 집으로 사라지는 텅 빈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규호의 집 창문에서 제일 가깝게 아이들의 모습과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그날이 아니었으면 나는 규호가 같은 반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다 못해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제대로 보기 힘든 겨울 어느 날, 아파트 단지는 버튼을 누른 것처럼 눈이 소복이 쌓이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릴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같은 반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공터로 모여 눈덩어리를 땀이 나도록 굴려 사람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편을 나눠 눈을 던지고 도망가고 쫓았다. 눈을 던지며 집요하게 쫓아오는 친구를 피해 규호의 아파트로 피신하다가 맞딱뜨린 건 경비실 앞에서 공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규호의 눈빛이었다. 끝도 없이 내리는 눈을 맞을 요량으로 쓰고 나온 빨간 털모자와 스키 장갑은 이미 공터의 무리에서 이탈한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그야말로 눈 한번 안 맞은 새것처럼 깔끔한 오리털 잠바를 걸치고 서있는 규호의 눈은 세상에 처음 나온 청둥오리 새끼처럼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규호의 모습을 본, 아직 함박눈의 수고로움을 알지 못하는 동심을 가진, 아이는

"야! 튀어~!"

라고 외치며 소리를 질렀고 규호는 영문도 모른 체 나를 따라 눈밭을 뛰기 시작했다. 세상을 온통 뒤덮은 하얀 눈 위로 내딛는 아이들의 발자국이 모두 새것이듯, 아직 해맑은 아이들은 말이 필요 없이, 한데 어울려 밤새 눈싸움을 벌였다. 서로를 알기 위해 많은 정보를 물어볼 이유도 몰랐고 상대가 나에게 맞는 사람인지 견주어 볼 필요도 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정신없이 뛰어다닐 뿐이었다. 경비실 앞에 숨어 아이들이 공터에서 눈과 함께 노는 모습을 지켜봤을 규호의 얼굴이 그려졌다. 지금과는 달라진 게 없는 흰 눈 같은 허연 얼굴과 긴 속눈썹, 호리호리한 체구.. 그러나 강남역에 내리는 비 같은 눈은 예전의 함박눈이 갖고 있던 반짝거림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규호도 나도 세월을 흘려보냈고 공터에서의 추억은 우리가 살던 아파트의 시멘트처럼 희미해졌다.







작가의 이전글 소설<알쏭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