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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Nov 27. 2021

소설<알쏭당>

냄새

80년대 말, 흔치 않은 방사형 모양으로 단지를 조성한 아파트 건물은 다시 못 올 경제부흥으로 희망으로만 점철된 주민들의 앞날을 예상이라도 한 듯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회색을 덧칠한 건지 시멘트 원래의 색상을 재연한 건지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콘크리트 원래의 느낌이 생생한 아파트의 첫인상은 차갑고 낯설었다. 엘리베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단층 건물의 서민들이 주로 거주하던 흔한 주공 아파트에서 막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서로의 위용을 자랑하듯 하늘을 가리고 서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며 새것에 대한 거부감이 그때부터 생겼는지 모른다. 새로운 아파트, 학교, 친구, 놀이터는 모두 새것이었고 지난 동네에서 몰래 설치해둔 찐득이에서 살아남지 못한 쥐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후련할 만도 한데 새집을 장만한 행복을 누리는 부모님에 비해 나는 어딘가 불안하고 못마땅했다. 지금은 어디에서나 뚝딱 거리며 금세 세워지는 신도시와 달리 우리 동네는 한강 이남에서 세대수와 입지면적이 가장 넓은 곳에 속했고 향후 부동산 시세차익을 크게 볼 수 있는 확정을 품은 희소성을 가진 노른자위 땅이었다. 그 땅 위에 이제 막 중산층에 진입한 가구는 더 부유한 가정을 꿈꿨고 이미 부를 향유하고 있는 세대는 더 큰 부를 누리기 위해 터전을 잡았다. 아마도 대다수의 엄마들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강남 8 학군에 비견할 수 있는 자식들을 위한 교육과 남편에게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체면을 주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엄마는 종종 아빠가 고객들을 상대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는 곳을 말했을 때 얕보지 않을 거라고 했고 회사에서도 직원들이 우리 집을 어떻게 입주했느냐고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단언컨대 어린아이인 내가 보아도  입주자들이 기존의 삶의 터전을 떠나 이곳을 택한 이유는 욕망이었다. 욕망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취하고 취하지 않고의 선택의 영역도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돌아가는 원동력이었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더욱더 공고하게 만드는 마중물 같은 것이었다. 또 그것은 솔직함의 여부를 떠나는 당연히 드러나는 냄새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욕망의 실타래가 꼬이기 전의 아이들은 정작 마음껏 뛰어 놀 공간이 여의치 않은 성냥갑처럼 빽빽하게 진열된 장소였다. 건축법을 충족하기 위해 겉치레로 만들어졌다는 걸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간결미가 돋보이는 놀이터는 그나마 비가 오면 흙장난을 하기 좋은 곳이었고 땅바닥과 아파트의 건물이 사이좋게 맞닿아 있는 시멘트 벽면은 포수를 대신해 야구놀이에 자연스레 가담했다. 단지를 감싸고 있는 가로수와 단지 안에서 아파트와 아파트를 경계 짓는 아름드리나무는 내 키만큼이나 제 모습을 갖추려면 아득히 멀어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자녀들이 신나게 놀 공간도, 어른들의 눈을 피해 숨을 곳도 쉽지 않은 이곳을 부모들은 좋아했다. 이 또한 그들이 기대했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매력적인 요소 중에 하나였을 것이었다. 판사, 검사, 의사, 사업가, 대기업 회사원, 교수.. 규호의 아버지 회사 엘리베이터의 한편에 걸려있는 층 별 부서 패널처럼 동급생 부모님의 직업은 나열되었고 아마도 선생님은 교단에서 학생들의 머리 위로 부모의 직업이 함께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단지에 사는 대다수의 부모들은 어딜 내놔도 떳떳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80년대 후반만 해도 학생의 아버지가 부장검사인걸 알면 한 번은 더 챙겨보게 될 수 박에 없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의 냄새가 남아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서 모든 학창 시절을 보냈고 청춘을 묻었다. 규호도 함께. 아마도 회색 아파트 단지에서 나도 모르게 몸소 터득한 것은 흑과 백이 아닌 그레이, 회색이었다. 때론 잿빛을 띈 빛깔의 회백색으로 빛나는 순간도 있었고 검은 회색에 가까운 암회색의 암흑기도 있었고 청색기가 섞여있는 회청색의 애매모호한, 아마도 그런 모호함이 내 전부가 된 것 같지만, 단 한 번도 회색, 그레이의 바탕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넌 흑과 백, 둘 중에 어디야?"

나는 단지 그에게 상품을 어떤 식으로 판매하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난데없는 흑백 질문에 당황을 하기도 했고 말문이 막힌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가 말하는 의중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적립보험료에 대해 물어보던 참이었다. 실제 보험료는 정해져 있고 거기에 적립이라는 이름으로 보험료가 추가되면 이율이 적용돼서 나중에 해지했을 시에 돌려주는 적립 보험료는 판매하는 사람이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따라 보험료의 단위가 달라지는 영업에서의 실력이 판가름 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데로 흑과 백의 의미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보험 설계사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있느냐는 의미였고 다른 하나는 지점에서 어느 편에 속할 것이냐는 최후통첩 같은 것이었다. 그의 선문답 같은 질문에 답을 찾고자 노력을 했던 이유는 그가 지점에서 실적을 제일 많이 올리는 고능률 설계사라는 이유 말고도 같은 팀으로 일 년 가까이 일을 하면서 바로 맞은편에 앉은 선배이자 몇 살 많은 형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감이 남다르게 다가온 이유는 그가 사는 곳이 스무 해 넘게 우리 가족의 터전인

방사형의 회색 아파트 단지였기 때문이었다.

"네~00 아파트 00동 00호로 보내주세요"

그의 목소리는 지점장 뒤로 항상 붙어있는 실적 패널에 가장 높게 붙어있는 스티커처럼 항상 당당했다.

"형, 거기 살아?"

그는 특유의 히죽히죽 웃는 표정으로 애들이 초등학교에 입학 한 이후로 그곳에서 쭉 산다고 말했다. 규호와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초등학교였다. 우리 가족은 IMF와 함께 조기 퇴직한 아버지가 어설프게 사업을 벌이다 퇴직금을 까먹고 그마저 남아 있는 돈으로 주식에 투자했다가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해 다 날려버리고 동네를 떠난 이후였다. 그때 내 나이 서른 살 때였다. 그리고 연극을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보험회사의 문을 두드리는 시기였다. 

"나 그 동네 원주민이야~"

아파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최고 시세를 찍었고 상황 판단이 영민한 거의 모든 원주민은 집을 팔아 높은 시세 차익을 보고 다른 동네로 떠났다. 들리는 풍문으로 많게는 20억 가까이 시세차익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들렸던 이유는 최초 입주할 때 상상치도 못한 적은 금액으로 분양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굳이 당신이 살고 있는 동네는 내가 최초로 입주해서 스무 해를 살았던 곳이기도 해요 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경기도 외곽의 시골에서 자라 보험 영업으로 번 돈으로 서울에 입성한 자수성가형 인물이어서 이기도 했다. 그가 이런 식의 선문답처럼 아리송한 말을 한 건 처음은 아니었다. 

서른 살 , 혜화동에서 미래가 안 보이는 몇 해를 보내고 무작정 들어온 보험회사는 교육기간 내내 이른바 잘 나가는 선배 설계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초빙되어 자신의 영업 노하우를 알려주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나중에 같은 지점에서 같은 팀으로 만나고 그에게도 말한 사실이지만 그의 첫인상은 참으로 거만하고 딱딱했다. 들어오자마자 무언가 불편한 듯 한참을 뜸 들이더니 옆에서 자신을 소개했던 내근직 직원에게 나가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더니 그가 나가자마자 자신은 내근직 직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직 보험회사의 최전선에서 상품 하나 판매하지 않은 신입이지만 그가 무엇을 꺼려하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군대에서도 실제 힘든 군 복무를 도맡아 하는 사병들이 장교나 하사관들을 경계하거나 상대를 안 하는 경우도 여럿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영업 노하우가 내근직이 알면 안 되는 그런 부분도 있으리라 지레짐작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한 시간 동안 이어진 그의 강의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다른 고액 연봉의 설계사들이 구체적이고 사례들을 들며 피부에 와닿게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해주는 것에 반해 그의 말은 모호했고 줄듯 말 듯 장난을 치는 인상을 받을 만큼 형편없었다. 

그래서 그가 흑과 백 중에 선택하라는 이상한 질문에 나는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살짝 짜증이 났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이 작지 않은 목소리로 "난 회색인데~"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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