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목 Dec 03. 2021

소설<알쏭당>

냄새

익숙한 동네를 떠나보내고 흘러간 시간은 곧 강남역으로 출근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가면을 흔쾌히 썼던 나날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동네의 모습에 반가울 만도 했지만 그러지 못한 건 정작 지난 십 년 동안 이곳을 떠난 건 등본상에 기재된 주소뿐이었고 우리 가족, 그 어느 누구도, 옛 집 옛 동네를 잊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IMF 이후 바닥난 가정의 재정은 결국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고,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누렸을 시세 차익의 이익은 감히 생각지 못했고 가까스로 단 몇천만을 건져 월세 보증금으로 댈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이가 자신이 살았던 동네를 원혼(寃魂)이 되어 떠도듯이, 어떻게 귀신같이 그런 집들만 찾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방사형의 아파트 단지가 잘 지내는지 어디서든 식별이 가능한 거리의 아파트를 골라 이사를 다녔다. 어쩌면 이 동네는 나보다 부모에게 더 각별하고 소중한 동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가깝다는 이유로 병원이나 마트, 심지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예전 동네의 카페로 찾아갔다. 새로움은 감당하기 버겁고 익숙함은 최고의 미덕인 그런 나이였다. 횡당보도에 신호등을 바라보고 서자 이곳은 정말로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좌석이 5개가 채 되지 않는 좁은 치킨집은 주인만 바뀐 체 그대로였고 벽면 가득히 , 이곳을 스쳐간 주민들의,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벽면의 추억은 동네 주민들 자녀들의 것이었다.

치킨집으로 가기 위해 횡당보도에 섰을 때,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는 아주 짧은 찰나에, 당장이라도 규호와 친구들이 뛰쳐나와 횡당보도를 같이 건널 것만 같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치킨집을 가기 위해서, 피시방, 호프집 그리고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선 이 횡당보도를 건너야 했다. 어쩌면 횡단보도는  놀 곳이 없는 아파트 단지에서 놀 곳이 있는 다른 동네로 연결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에 서면 설레었던 이유는, 거리가  5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유독 길어 보이는 물리적 거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치킨집 바로 옆에 자리 잡은 비디오 가게 때문일 거다. 지금은 옛 추억의 물건이 되었지만, 비디오테이프를 빌린다는 행위는 잠시 영화 한 편을 소장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 그리고 비디오를 빌리러 "씨네필" 그래, 매장 이름이 생각났다. 씨네필에 들어서면 샛노랗고 화려한 네온 조명이 우릴 먼저 반겼고 깊숙이 뚫려있는 진열장으로 수많은 비디오가 마치 책장 속의 책처럼 꽂혀 있었다. 그리고 비디오를 보는 것보다 카운터의 이쁜 아르바이트생에게 말을 거는 게 더 설레는 그런 나이였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떤 남자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하얀 피부와 검은 생머리를 가진 아르바이트생은 씨네필의 강렬한 네온사인 때문이지 몰라도 영화 속 여배우들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들 모두 마음속으로 그녀에 대한 흠모를 갖고 있었지만 선뜻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한 건 그녀가 세 살 많은 연상이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였다.

2002년 6월 4일은 우리나라 국가대표가 처음으로 월드컵에서 승리를 거둔 날이자 규호가 친구들 중에 처음으로 여자 친구를 소개해준다고 데리고 나온 날이었다. 데리고 나왔다는 표현이 함께라는 함의가 있으니 불러 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치킨과 생맥주로 월드컵에서의 첫 승리를 즐기고 있던 자리에 찬물을 끼얹은 건 동네형처럼 친하게 지냈던 사장의 말 한마디였다.

"에라이 못난 놈들아~저기 테이블 보이지?"

닭다리를 뜯다 우리의 눈이 도착한 곳은 홀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또래의 청춘남녀였다.

"옆에서 들어보니 지금 막 거리에서 말을 걸어 데리고 왔어~이 눔 들아 밖을 봐봐~ 앞으로 살면서 이런 기회가 흔할 것 같냐?"

월드컵 개최지로도 모자라 생전 처음 보는 완벽한 첫 승리는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고 아직도 거리에서는 사람들의 환호성과 차량의 경적이 끊이질 않았다. 축제 분위기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동네에 정착해서 처음 느껴보는 벅찬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해본 친구들은, 남고의 영향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온, 오늘이 바로 낯선 이성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날이라고 그치지 않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경적소리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먼저 한번 나가보자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나가서 여잘 꼬셔 올 테니 술값은 니들이 내는 거다?"

그때 규호가 특유의 히죽대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평소 같으면 온갖 부정적인 말과 장난으로 깍아내렸을 친구들도 숨죽이고 규호의 대책 없는 입을 쳐다봤다. 뭐 나름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는 규호였지만 또래 남자들의 평균보다는 한참 작은 신장과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린 몸은 여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매력적으로 보일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말리기 무섭게 치킨집을 나선 규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친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쟤 저렇게 집에 가는 거 아니겠지?"

일동 약속이나 한 듯 웃음이 터졌다. 원체 내기를 좋아하는 규호였지만 혈혈단신으로 적장에 뛰어드는 무모한 짓을 한 것 같아 신경이 쓰였지만 계산이 서지 않으면 절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규호였기에 내심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치킨집 문 앞에 달려있는 종이 흔들리자 우리는 일제히 눈을 돌렸고 규호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여자의 얼굴이 치킨집 조명에 제 모습을 드러남과 동시에 누구랄 것도 없이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 탄성은 감탄보다는 탄식과 한탄에 가깝다고,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인사해~ 여자 친구야~"

규호와 함께 들어온 여성은 다름 아닌 비디오 가게 알바 누나였다. 처음엔 규호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마침 비디오 가게가 끝나는 시간을 맞춰서 우리의 술자리로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둘은 나란히 앉아 보란 듯이 손을 잡고 있었고 그 모습이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 오른 연극배우가 그러하듯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면으로 가릴 수 없는 진실한 연기였다.

"언젠가는 말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사귄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우리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꽤 재밌는지 그녀는 연신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규호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계획한 것처럼 재밌다는 듯이 으스대며 웃었다. 규호는 가끔 이렇게 은밀하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상대가 깜작 놀라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는 음흉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규호와 나눴던 대화가 영원히 수습되지 않아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한 줄기 빛으로 머릴 스쳐 지나갔다.

'분명한 건 여자 친구를 너희들에게 보여주는 날은 그 여자와 섹스를 한 이후일 거야'

이성과 교제를 시작하고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여자 친구를 보여주는 날이 언제가 적절한지 김칫국부터 마시는 소릴 연애에 숙맥인 놈들이 주저리 할 때 규호가 내린 정의였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며 한 손을 들어 올리는, 한 번에 하기 어려운 동작을 단숨에, 마치 영화'원초적 본능'의 샤론스톤이 심문받을 때 취하던 뇌쇄적인 자세를 하는 그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형식상 내뱉고 담배를 물었다. 단지 규호를 제외한 나와 친구들은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넋이 나간 체 볼뿐이었다.

그녀는 우리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네 주민이었다. 평범한 생맥주를 마치 칠레산 와인을 마시는 듯  고혹적인 그녀는 직접 대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집에서 가까운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다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두 살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슴살 청년들은 그녀가 어른처럼 느껴졌다. 당시 여자들이 자유롭게 담배를 피기 힘들었던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어떠한 제약도 눈치도 보지 않고 담배를 참으로 맛있게 피웠고 아마도 그때부터 담배라는 기호식품에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와 사귀게 된 드라마 같은 연애 스토리를 규호가 손짓을 하며 주저리 떠드는 순간에 나는 집중을 하지 못한 체 힘들지만 야릇한 상상에 빠졌다. 조금 전까지 필드를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던 운동선수들의 과격한 움직임이 괴롭지만 그것마저 즐기겠다는 얼굴로 흐느끼며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온몸을 비틀어대는 그녀로 떠오르는 건 우연이었을까. 그날 밤 주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운 입술을 모아 담배 연기를 풍기던 그녀의 자태를 떠올리며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살아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사정을 한 첫 경험이었는지 모른다.

벽면에 굵은 사인펜으로 쓰인 '2002.6.4. 폴란드전 승리. 월드컵 첫 승리'

글 아래로 내가 쓴 것 같은, 아마도 그랬을,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규호와 씨네필이 만난 날'










 



작가의 이전글 소설<알쏭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