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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Dec 17. 2021

소설<알쏭당>

냄새

단 한 번도 이 곳으로 이사 와서 본 적 없는 흉측하고 괴기스러운 문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미칠 듯이 때리고, 차고, 부순 생생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차마 초인종을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남자, 그것도 보통의 힘과 분노가 아니면 두터운 철제문을 저렇게 박살 낼 수는 없었다. 불현듯 며칠 전 호중이 흥분을 가라앉지 못하고 씩씩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젠장, 미친 새끼...

" 왔냐? "

규호의 목소리는 대문이 뒤틀려 바닥에 끌리는 요란한 소리처럼 날카롭고 냉소적이었다. 하... 실소에 가까운 웃음으로 녀석을 쳐다보자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 어젯밤에 경찰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호중이가 술을 처먹고 와서 문을 때리면서 난리를 피우더라고 "

날카로운 신경을 애써 다잡으며 말하는 규호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 보였다.

"왜? 왜 시발, 왜 그랬데?"

뱃속 깊은 곳에서 욕이 마구 올라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난리를 쳤는지 알고 싶었다. 

" 문을 열어서 물어보지 그랬어? 왜 지랄을 하는지 "

미안함에 더 그랬는지 모른다. 호중은 아직까지는 규호의 친구라기보다는 나를 통해 알게 된 친구였다. 그놈의 성깔, 가끔씩 욱하고 올라오는 저 알 수 없는 울화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화가 올라오면 어떻게든 풀어야 속이 시원한, 다혈질의 호중이의 성격은, 단 한 명, 나에게는 예외였다. 그리고 항상 저렇게 폭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평소엔 말수도 없고 오히려 잘 삐치기도 하는 여린 성격이었다. 며칠 전 호중은 나에게 규호가 집에서 씨네필에게 하는 못마땅한 행동을 말하면서 마지막에 끝맺었던 말이 생각났다.

" 지가 뭐라고, 너 기억나지? 전번에 우리들 캐리커쳐 그리면서 단 멘트들 "

며칠 전, 규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며 친구들의 특징이 있는 캐리커쳐와 함께 몇 줄의 코멘트를 달았었다. 그가 바라본 친구의 성격이나 특징이 담겨 있는 그림 카드를 제각각 받아 든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술을 먹다 깜박하고 규호의 집에 두고 가기 일쑤였다. 나도 그랬다. 

' 우정에 헌신적임, 친구들을 아우르는 친화력이 있음, 여자한테 관심 없음 '

대략적으로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보는 한계를 갖고 있구나 정도의 생각을 갖고 어디엔가 버렸던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나도 호중처럼 약간은 누군가에게 재단 당했다는 석연찮은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 쟤 누나 좋아하냐? 밤새 문을 발로 차면서 울부짖던데, 누나한테 그러지 말라고, 참 나 "

그새 누나와 깊은 정이 들었던 걸까, 호중은 무리 중 유독 씨네필을 좋아했다. 어쩌면 남중, 남고만 나온 순진한 우리들에게 처음으로 가까워진 여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누나는 우리가 자주 놀러 가던 비디오 가게의 알바생으로 이성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해 줬고 그것을 보기 좋게 깨준 친구의 여자 친구이기도 했다.

"문을 어떻게 열어주냐? 완전 미친놈처럼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쌍욕을 하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데, 어쩔 수 없이 경찰한테 신고한 거야, 동네에 무슨 망신인지, 그나저나 문짝 값이 몇십만 원 나가게 생겼다, 아 놔"

대수롭지 않게 훌훌 털며 말하는 것 같지만 규호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들어올 때 마주한 대문은 지난밤의 난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저 새끼가 똘아이지.."

나는 차마 못 누른 초인종이 울렸다. 씨네필이었다.

" 누나도 어젯밤 같이 있었어~문 좀 열어주고 올게 "

아.. 누나도 어젯밤에 같이 있었구나. 누나도 규호와 함께 호중의 미친 욕설을 듣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띵해졌다. 누나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지만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어제 내가 호중이랑 얘기 좀 해보려는데.."

누나는 친구들의 싸움의 원인이 왠지 자신 같아서 미안했는지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됐다고! 어제도 누나가 자꾸 나서려는 걸 내가 막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됐다고! 넌 나서지 마~!"

규호는 나와 누날 번갈아 쳐다보며 짓누르고 있던 화를 쏟아냈다. 이제는 규호의 그런 행동이 익숙해졌는지 누나는 체념 어린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다. 단지 검은 눈동자가 빛났을 뿐인데 마치 눈물이 날 것 같은 눈빛을 감지한 건 나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게 호중이의 예측 불가능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를 만나 면전에 대고 온갖 욕설을 내뱉고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냅둬라, 어차피 난 앞으로 걜 만날 생각도 없으니 "

주먹을 꽉 쥔 내 손을 봤는지 규호는 체념한 듯 말했다. 누나도 거들었다.

"호중이 착한 애인 거 알잖아.. 술김에 뭐가 서운한 게 있었나 보지.."

누나 말대로, 내가 워낙 그의 성격을 잘 알아서 그렇지, 정이 많고 친해지기가 어렵지 한번 친해지면 제 것을 내어주는 속정이 있는 놈은 맞았다. 누나도 지난 몇 달 동안 호중의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집으로 들여서 속내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난리를 본 이상 호중의 좋은 점만 보기는 어려웠다.

규호의 집을 나서면 바로 앞 동이 호중의 집이었다. 집 앞 놀이터로 나오라는 나의 성화에 호중은 짐짓 불쌍한 목소리를 하며 집으로 오라고 했다. 몸이 안 좋다는 말과 함께, 녀석은 항상 그렇게 상대의 화를 돋아놓고 동정심에 기대 상황을 빠져나갔다.

" 너도 솔직히 지켜보기 어렵잖아, 누나한테 하는 행동이나, 돈 좀 있다고 우릴 지 꼬봉으로 보는 거지, 별 것도 아닌 게 한판 붙으려는데 나오질 않더라, 한주먹 감도 아닌 게.."

비록 말은 규호에 대한 분노였지만 호중은 큰 눈을 더 애처롭게 만들며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 그래도 그렇지, 문짝을 저렇게 만들고 깽판을 치냐?? 집에 누나도 있었데! 미친놈아!"

누나라는 말에 약간은 놀란 호중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

"누난 보통 밤에 집에 가질 않나, 거의 새벽이었어.."

"사과해라~규호랑 누나한테, 이건 규호가 어떤 놈이든 네가 잘못한 거야 "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호중에게 매섭게 말했다. 호중은 평소답지 않은 내 모습에 놀란 척을 했지만 이내 표정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

고갤 숙이고 말을 잇지 못하는 호중의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 그래 꼴리는 대로 행동하니 속이 시원하냐? 에휴 부럽다 부러워..'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직을 반복하는 호중의 성향은 어쩌면 이때부터였는지 모른다. 누구나 보고도 못 본 체하는 사소한 말이나 행동을 호중은 참지 못하고 지르고 나왔다. 그런 호중의 성격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고 언제부터인가 다들 꺼려했지만 나는 좀 달랐다. 호중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명절 때마다 집안 곳곳에 쌓이는 선물 세트와 밤늦게 아버지가 집에 돌아 오면 쥐죽은듯이 조용해지는 집안 분위기를 몸소 느꼈기 때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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