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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Dec 15. 2021

소설<알쏭당>

냄새

"돌아가렴.."

중년 여성의 칼같이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것은 한치의 정(情)도, 단 하나의 반가움도 섞이지 않은 단단한 얼음장 같은 철벽이었다. 규호는 떨고 있었다. 뉘엿뉘엿 해가 자취를 감추고 밤이 찾아와서는 아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어 심장에 꽃이면 저렇게 떨 것만 같았다. 한동안 규호는 발로 차면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녹슨 철제 대문 앞에서 고갤 숙이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청춘들이 객기를 부리며 부딪혀야 할 무엇도, 규호의 장기인 집요한 고집도 통하지 않는 어쩌면 그의 또 다른 분신이었다. 

"규호야~ 이제 가자.. 버스 끊기겠다.."

그에게 어렵게 다가서서 나지막이 말을 했다. 규호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밤하늘 위로 유난히 잘 보이는 애꿎은 눈발을 한없이 바라봤다. 치기 어린 마음에 왜 이곳까지 날 데려왔나 하는 원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만큼 작은 체구의 규호가 유독 더 작아 보인 날은 없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규호는 신기하리만큼 수다를 떠들어댔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안나는 의미 없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무거운 공백을 채우던 그는 서울에 다다르자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아직도 차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야속한 겨울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한 집의 온기를 느끼자 상주에서의 일은 어느덧 지난 일이 되었다. 규호도 지금은 감당하기 힘들겠지만 곧 익숙해지리라, 규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희 엄마 사투리가 난 듣기 좋더라~"

에라이, 말끝마다 뭐꼬? 뭐라꼬? 난 꼬자만 들으면 경기가 난다, 이놈아, 그리고 난 위로랍시고 구구절절하게 어디서 들은 풍문을 늘어놓았다.

"인간에게 부모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한 시기는 태어나서부터 딱 5세까지라고, 논문으로도 나온 얘기야,

그러니깐 넌 참 뭐랄까, 참 효율적인 거지, 딱 엄마와의 애착관계가 필요한 시기까지 함께 한 거지"

항상 말 중간을 잘라먹고 치고 들어오던 규호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는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요즘 내가 엄마에게 원하는 건 딱 밥만 차려주고, 외출하는 거야,

너 얼마나 좋냐? 집에 가면 아줌마가 밥 딱 차려주지, 누가 잔소릴 하는 사람이 있나~"

부럽다는 말로 마무릴 해야 완벽한 설득이었겠지만 솔직히 부럽지는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를 위한 위로였고 안락한 가정은 내게 당연한 것이었다. 엄마는 그것을 밥 정(情)이라고 했다. 밥을 하는 것은 단순히 짓는 게 아니라 하는 사람의 기운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언제 그렇게 자세히 봤는지 규호의 손가락을 보고 내게 말했다.

"걔 손가락 끝이 다 갈라졌더라~영양이 불균형해서 그래, 아무리 도우미 아줌마가 해준다고 한들 지 엄마 손길이 들어가야 진정한 식사인 건데.."

초등학교 때는 엇비슷했던 키도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고 엄마는 그게 본인이 영양을 생각하고 식단을 짰기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했다. 이 추운 날에 지방엔 왜 갔다 왔냐며 타박을 하는 엄마의 잔소리는 배고픔에 굶주린 한창의 청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늦은 저녁을 하고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규호는 왜 갑자기 엄마를 보러 거기까지 갔을까, 단 한 번도 엄마 얘길 하지도 않던 놈이, 그리고 규호 아버지는 십 년 넘게 숨겨온 엄마가 사는 곳을 알려 주었을까, 그도 호락호락 제 것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철제문을 부수고 들어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추운 날 그것도 눈보라를 헤치고 찾아갔건만 아무런 소득이 없이 돌아왔다는 사실도 참 서글펐다. 깽판을 쳤으면 치고도 남을 규호인데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서있었을까, 


어떤 위압감도 주지 못하는 시골 대문 앞에서 물끄러미 서있는 규호를 본 이상 그가 씨네필에게 하는 행동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그런 사연을 지켜본 적 없는 친구들은 규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염려했던 일은 그것을 염원이라도 한 듯 어김 없이 일어났다. 

"지금 울집으로 올 수 있니?"

규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사달이 일어났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규호의

집은 그가 오라고 부탁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전활 해서 허락을 받고 가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씨네필과 결국 끝을 본건가, 설마 씨네필이 다른 남잘... 그럴 수도 있었다. 그녀는 어디에서라도 눈에 띄는 존재감을 가졌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규호도 여러 번 내게 그런 불안감을 표출했기에 더 했다. 처음엔 의처증 비슷한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 해 겨울, 상주행 이후로 규호는 어쩌면 예전의 그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다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급하게 규호의 집에 도착하자, 나를 반긴 건 , 구겨지고 움푹 들어간, 매일 같이 마주하던 철제 대문이었다. 단 한 번도 여기 아파트로 이사 와서 본 적도 없는 흉측하고 괴기스러운 문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가 미칠 듯이 때리고, 차고, 부순 생생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차마 초인종을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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