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이 잦은 직업적 특수성상 지방에서 일이 끝나면 그곳의 카페에 들려 커피 한잔을 하곤 한다. 오랜만의 외유를 일만 하고 서울로 돌아가기 아쉬운 면도 있고 온 신경을 쏟고 난 후에 달달한 음료가 땡기기도 해서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 카페에 머물다 보면 지방 소도시의 사람들의 대화도 엿들을 수 있고 창밖으로 그곳의 정취도 잠깐이라도 담을 수 있어서 일 수도 있다. 지방 소도시의 카페를 가면 대개 서울의 카페보다 공간이 넓고 특히 주차공간이 널찍해서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한적하다. 그래서 그럴까, 주문을 하거나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보면 직원들의 응대가 좀 무료해 보인다. 번잡한 도시의 카페에서 느껴지는 반복되고 기계적인 친절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건성으로 들릴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불친절하다고 느낄 만도 하다. 오랜만에 휴가를 가는 친구에게 제주도를 여행지로 추천을 했더니 친구는 복귀하자마자 제주의 풍광이 아니라 제주 사람들의 불친절함을 먼저 꺼냈다. 음식점이고 카페를 가면, 사람이 가는지 오는지 관심도 없고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소개팅의 주선자가 된 것처럼 미안해진 나는 제주라는 지역의 특수성을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지방 소도시의 카페와 제주도의 모든 서비스 종사자들이 불친절 한 건 아닐 거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어렵게 시간을 내서 간 휴가인만큼 평소보다 친절의 강도가 예민하게 다가왔을 가능성도 있고 정말로 불친절한 서비스를 운 좋게(?)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친구의 말을 듣고 곰곰이 지난 여행들을 떠올리니 나에게도 그런 불친절함을 느낀 경험들이 떠올랐다. 특히
유럽 배낭 여행 당시 스위스 융프라우 기차역에서 역 직원에게 내가 대놓고 뚜렷한 영어로 "유알 낫 카인드"라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 직원은 내 컴플레인에 죄송하다는 말 대신 네가 부주의했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시 너무 황당해서 "나는 너희 나라에 여행을 처음 온 관광객"이라고 짧은 영어를 또렷하게 말했었다. 직원은 애초에 내가 어디서 왔는지, 이곳에 처음 온 것인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배려 깊은 서비스를 기대한 내 잘못이었다. 서울의 관공서, 음식점, 카페 어디를 가도 그런 말이 육성으로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만큼 한국, 특히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든 서비스 종사자들은 친절한 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대도시에서의 친절이라는 서비스는 무조건 일방적인 건 아니다. 동생은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유독 더 친절하다. 음식점이나 카페 어딜 가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를 달고 산다. 가끔 만나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온다.
"나한테 좀 그렇게 친절해봐~"
동생은 황당한 듯 웃지만 만약 반대로 동생이 무례한 언행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것 또한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상대의 친절은 나로 하여금 없는 친절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동생의 과한 친절을 보면서 나를 한번 돌아보기도 한다. 형제는 닮고 핏줄은 속일 수 없다고 나와 내 동생은 아버지에게 친절한 성격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음식점이나 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있는 장소에 가면 가족 중에 어머니만 동조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지적을 받는다. " 아까 직원한테 엄마가 너무 심하게 얘기한 것 같은데..."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는 이렇게 대꾸한다.
" 그럼 내가 어떻게 얘기하니? 난 서비스를 받으러 온 사람인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나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배려와 친절이었다. 내 딴에는 최소한의 예의, 친절, 배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상대로 하여금 자신에게 호의가 있거나 심지어 자신을 따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와 반대로 조금은 덜 친절한 사람을 보면 무례한 사람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친절이라는 미덕이 서비스로 전락한 현시대에서 사람 간의 친절은 상대를 낮게 보거나 혹은 자신의 뜻에 동조한다고 착각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어쩌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친절이라는 덕목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닐 수도 있다. 친절이 관대함으로 연결된다면, 너그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흔히 말하는 호구로 전락하는 건 한 순간이다. 현재의 소비자들은 자신이 호구가 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조금씩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정노동을 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이 당하는 갑질 피해의 대부분은 , 원래부터 타고난 갑들에게 당하는 경우는 있겠지만, 그런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착한 사람들이 서비스의 차별을 느끼고 제기하는 컴플레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도로 발달하는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는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모두를 연결시키는 장점도 있지만 나쁜 경험도 빠르게 공유한다. 그리고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한눈에 보기 쉽게 비교하기 때문에 지금의 소비자들은 물건 하나를 구매해도 예민하게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따진다. 무엇보다 제 값을 하느냐의 구매의 효율성은 돈을 쉽게 벌어 쉽게 소비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누구나 신중하게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의 갑질 논란은 많이 벌든 적게 벌든 누구나 힘들게 돈을 벌고 있고 소비만큼은 제값 어치를 내며 혹은 그 이상을 바라며 소비활동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갈수록 정통적인 미덕과 기치관은 점점 퇴색해져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대도시에서의 친절은 그것이 서비스인지 진심인지 헷갈릴 정도로 경계가 희미해졌다. 아니면 그것이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되어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장기화된 코로나로 인해 근무면에서 예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업종은 어디일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가끔 음식점이나 판매점을 가면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응대하는 직원들을 만나게 되는데 예전의 미소는 본 데 간 데 없고 눈만 빼꼼히 보일 뿐이다. 그분들을 보며 마스크로 표정을 가리니 아무래도 감정노동이 조금은 덜었겠구나 라는 생각은 너무 비약일까?
"고객은 왕이다"라는 문구는 오래전부터 사용된 말이라 누가 언제부터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갈수록 치열해지는 기업의 무한경쟁에서 마지막으로 차별화할 수 있는 점이 바로 인간이 재공 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꺼내 든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 문구로 인해 수많은 갑질과 차별로 인해 부작용을 양산했다.
"유니클로" "자라" 같은 spa매장을 가면 친구가 말했던 손님이 오는지 가는지 관심 없는 직원들이 손님이 말을 걸기 전까지 자신의 일만 묵묵히 한다.
과도한 친절이 어느 새부터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면서 이제는 필요한 친절만 제공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분위기에서 옷도 편하게 입어보고 옷을 안 산다고 눈치도 볼 일도 없으니 오히려 그곳에 가면 옷을 더 많이 산다. 손님들의 심리와 니즈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마음껏 입어보고 돌아다니다가 정말로 내가 사고 싶을 때 사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친절한 게 아니다. 필요한 인사만 한다.
조금전까지 나의 커피값을 계산하던 직원이, 직원인지 사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카페 입구로 나가 계단에 주저앉아 담배를 한대 피운다. 지방 소도시의 카페는 서울처럼 손님이 끊임없이 밀려들지 않으니 여유가 있을 것이고 친절 또한 탄력적이고 유연하다 보니 본래의 기계적인 친절은 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저 사람도 바쁠 땐 신나게 인사를 하고 오늘 같이 무료한 날이면 목소리에 힘이 쭉 빠질 거다. 그리고 그런 점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대도시보다 유독한 적하고 넓은 카페도 한몫하겠지, 직원이 화들짝 놀라 담배를 급하게 끄고 카운터로 들어간다. 나에게 보여주지 않은 환한 미소로 응대를 한다. 아마도 단골인 거 같다. 하긴 나 같은 뜨내기손님보다는 좁은 지역 사회의 가까운 주민이 더 반가울 테니 말이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지 하며 남은 커피를 마신다. 친절은 언제부터 서비스가 된 걸까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친절이란 미덕은 우리가 화폐라는 재화를 통해 물물교환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부터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불온한 생각을 해본다.